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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의 연원과 향방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비교하여
철학사전에 의하면 부조리(Absurdity, L’absurde)란 불합리ㆍ불가해ㆍ모순으로의 인도를 말한다. 이는 두 개 이상의 항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다름의 관계이다. 바라는 거소가 실제의 것이 다른 경우, 옳은 것과 실제의 것이 다른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부조리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는 부조리의 존재에 대해 서로 다른, 정체성 짙고 유의미한 상징물을 제시한다.
<페스트>의 경우, 그 상징물은 역병이다. 역병은 의미 있는 죽음을 바라는 인간 의지와 무의미한 죽음을 선사하는 자연의 갈등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상징한다. <구토>의 경우, 그 상징물은 구토 현상이다. 구토는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식적 편견이 야기한 교정된 시선과, 세계가 본래 타고난 양태에 대한 직시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부조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카뮈와 사르트르가 각각 제시하는 부조리와 그것이 촉발하는 상황의 양태는 사뭇 다르다.
카뮈의 부조리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또는 반증으로) 인류애와 형제애를 가져온다. 개개인의 대응과 신념에 차이가 있을 지언정 리외, 그랑, 타루를 시작으로 랑베르, 파늘루, 코타르 등의 인물들은 힘을 모아 부조리에 ‘반항’한다.
반면 사르트르의 부조리는 자기 실현의 열망을 가져온다. 로캉탱은 스스로 세계에 존재하는 ‘즉자’로서 세계를 직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며 끝에 이르러서는 예술을 실천함으로써, 즉 자기 자신을 세계에 선언함으로써 부조리를 극복하고 세계에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견해가 각자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그 차이는 부조리라는 하나의 개념의 두 측면을 비추고 있거나 아니면 부조리라는 큰 틀 안에 두 개의 세분화된 정교한 개념이 있음을 가리킨다. 요컨대, ‘반항’과 ‘참여’는 양립하거나 양립하지 않는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 부조리의 연원과 향방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부조리에 대응하는 두 방식이 같은 방향을 향해 서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 작가가 제시하는 부조리의 근원과 진행 방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페스트>에 드러나는 부조리의 근원은 세계의 질서 그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역병은 복잡계의 순리에 근거하여 발생한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많은 사건들이 역병을 발생시킨다. 태양의 열기와 오랑의 환경,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양식 등이 한 군데에 얽혀서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갑자기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자연 현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 자연 현상은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이 그를 의식하기도 전에 그들을 덮쳐서 그들을 유린한다. 이 시점에서 인간은 부조리를 인식한다. 즉 인간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은 인식의 오차, 내가 인식하는 죽음과 나의 일상적 거리와 실제 거리의 차이가 발생하는 시점에서이다. 문명의 시작에 이르러 우리는 죽음에 대항하는 많은 인위적인 장치들을 만들었고 그것들에 익숙해짐에 따라 죽음과 우리의 거리를 실제와는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 인식의 오차, 부조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간 군상이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의지를 결연히 하여 부조리에 대항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회피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타인의 이익을 침해한다. 이 또한 복잡계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카뮈는 이 복잡계가 형제애와 인류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등장인물들이 의용대를 꾸리고, ‘부당한’ 죽음에 대항하며, 어린 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연대 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그 근거이다.
<구토>에 드러나는 부조리의 근원도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실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 사이의 오차가 부조리의 근원이다. 부조리의 징후로 지목되는 구토 현상의 족적을 따라가면 그곳에는 항상 인식의 오차가 존재한다. 사물과 현상의 실재와의 돌연한 직면으로 묘사되는 일련의 구토 현상들은 로캉탱의 인식과 실재의 차이가 유의미한 정도로 존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합리적 판단이나 이성적 사고에 근거한 유의미한 지각의 쌓임이라기 보다는 편견, 착각 등의 심리학적 정의로 설명되는 인간 의식의 한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종류의 인식적 착오와 고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선을 갖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ㆍ정신적 제한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오히려 <구토> 속 로캉탱이 인식과 실재의 차이를 감지하고 구토를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제한을 극복한 소설적 장치로 보인다. 요컨대 위버멘쉬 모티프를 차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자유로움을 성취할 수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소설 쓰기’라는 답을 제시한다. 사르트르는 존재가 부조리를 지각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하는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남의 얘기가 아닌 자신의 얘기를, 배낀 얘기가 아닌 창조한 얘기를 만드는 데에 전념할 수 있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천적 한계로 인해 실재와 인식은 차이를 갖고, 이 차이를 인간은 부조리로 인식한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카뮈는 연대를, 사르트르는 창조적 자아를 제시하였다. 나는 이 두 제안이 동일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본다.
차이는 극복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오랑 시의 강렬한 태양 빛이나, 로캉탱의 백일몽 같은 체험과도 같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적응의 대상이라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존재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 이전의 것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극복은 철저히 존재의 선후성에 근거한다.
앞서 존재한 것들에 대한 ‘반항’과 ‘참여’를 우리는 선제적 조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후시적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을 위한 조치일까?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몸부림치는 것은 모종의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훗날 사르트르가 주장하였듯) 휴머니즘을 위한 것이다. 반항과 참여는 세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휴머니즘, 그러니까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을 부정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일종인 것이다. 그것이 선제적 조치로 보인다면, 또는 그것이 유의미한 변화의 바람을 불어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일종의 인식적 착시에 의한 것이다. 부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본질적 극복을 허용한 적이 없다.
<페스트>와 <구토>의 두 저자는 동일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그들이 사상적으로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차이를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였음은 그들의 질문이 합리적이고 정당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발생하는 많은 ‘차이의 교정’과 ‘교정의 차이’는 이미 카뮈와 사르트르의 갈등에서 예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의 죽음에 이르러 사르트르가 뒤늦게나마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을 본다면 부조리에의 대항 그 기저에 위치한 휴머니즘을 언제나 기억해야만 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 썼으니 죄와벌 보러 간다 히히
복붙해서 먼저 제출할게 수고
응 이미 제출했어~
ㅋㅋㅋㅋ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너무 뇌피셜이 많다고 느낌. 일단 두 작품을 분석하는데 작품 인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조금 그렇고, 카뮈가 그린 연대를 부조리에 대한 반항으로,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그린 예술을 '참여'로 해석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어서 더욱 그럼 - dc App
다 읽고 나서도 사르트르와 카뮈의 구별점이 어딘지 잘 모르겠음. 글 마지막에도 나오는 것처럼 사르트르와 카뮈는 후에 크게 싸우는데, 글만 읽어서는 어디서 그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분명치 않음. - dc App
개인적으론 좀 더 한 부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위버멘쉬에 대한 차용 같은 내용이나 휴머니즘은 다 빼고,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에 최대한 집중하면 좋은 글이 될 것 같음. 카뮈와 가장 대별되는 지점이니까 - dc App
중간에 구토에서 즉자 -> 대자로 바뀌어야 할 거 같음. 글고 구토 현상은 인식론적인 문제보다는 존재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현상 아닌가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참여를 이야기했다는 것도 금시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