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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을 읽었다. 힘들었다.
내가 이 후에 모비 딕을 읽는 사람에게 충고할 만한 것은, 언제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일까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흰 고래와의 추적과 사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이 장편 900페이지에 달하는 압도적인 분량의 소설에서 후반 10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흰 고래를 기다리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 보다 조금 더 짧을 것이다.
대신 흰 고래에 대한 것은 잊고, 서두부터 시작된 고래에 대한 멜빌의 애정. 거대한 리바이어선이 현대 공업 사회의 생물로. 그러니까 신화속의 괴수가 일개 생물로 전락하는 그 일련의 과정과, 고래와 고래에 엮인 그 많은 이야기들. 포경선의 일상에 대한 생생한 증언-고래의 경뇌유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이 미끌거리는 장어가 된 것 같다는 것 같은-을 읽어나가다 보면-나도 여기서 몇번이고 지쳐 나가떨어졌다 다시 붙잡았지만-시작되는 모비 딕과의 추적에서, 독자는 압도당한다. 햄릿 같은 항해사-지금 저 미친 영감 머리에 납탄이나 박아주면 집에 갈텐데-와 자신들의 피해로 재앙을 예고하는 다른 포경선-아들을 잃었소-과 계속되는 불길한 전조-독수리가 모자를 뺏었다 돌려준 자는 왕이 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들. 마치 이 것은, 1km짜리 롤러코스터에서 990m까지 수평에 가깝게 느릿하게 올라가기만 하다가, 마지막 9m는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더니, 마지막 1m는 그냥 90도로 쑤셔 박히는 느낌이다.
그 한가운데 광기와 집념에 사로 잡힌 에이허브. 보트가 세 번 부서지고 그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뒤에도 다시 모비 딕이라는 파멸로 달려가는 에이허브. 그에 압도되어 파멸이 올 것임을 짐작함에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피쿼드 호의 선원들. 그리고 그런 에이허브를 무색하게 하는 재앙 그 자체인 모비 딕. 모비 딕 이후로 나온 비유들에서, 대적자-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배트맨과 조커, 셜록과 모리어티 등등-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에이허브와 모비 딕이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만큼 에이허브는 강렬하며, badass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한다.
…라고 생각했는데, 좀 돌아보면 대적자…라고 하기엔 조금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네 찐따가 일방적으로 강호동한테 라이벌이라고 하는 걸 보는 같은. 결국 어찌 할 수 없는 대 재앙 자체인 흰 고래에 대해 그 것이 자신의 파멸이 되더라도 돌진하는 에이허브에서, 문득 이영도의 오버 더 호라이즌이 떠올랐다.
"엘프가 인간보다 더 빨리 늙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야, 호라이즌. 자넨 악기뿐만이 아니라 자네 자신도 죽이고 있어. 지평선을 넘을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보인다고 해서 전부 다 닿을 수 있는 건 아냐”-티르 스트라이크. 오버 더 호라이즌
지평선을 넘어봐야 또 다른 지평선이 이어지기에 넘을 수 없는 지평선을 넘어 보이겠다고 자기 파멸적 여행을 계속하는 엘프 호라이즌과 절대적인 파멸의 표상(혹은 대자연 그 자체…일까.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인 흰 고래를 잡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던 에이허브가 오버랩 되어 보인다고 하면 내 과대 망상일까.
쓸 데 없이 감상에 겉 멋만 들어 쓴다. 안 좋은 습관이다.
더 길게 쓰고 싶은데,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놔두다 안쓰게 되더라. 그냥 올린다. 나중에 더 보충해서 쓸지도 모르지.
에이허브의 광기하나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