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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남은 자는 수치심을 느끼는가?

<>,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호모 사케르>


사고, 전쟁, 재난, 대학살과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혹은 그런 상황과 일절 상관없는 자들 역시도)은 예외 없이 죽은 자들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곤 한다. 그들을 구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생존자들에겐 죽은 자들을 구해낼 힘이 애초부터 없다. 죽은 자들이 맞이했던 상황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다. 생존자들이 힘을 합친다고 해서 가라앉던 배가 다시 떠오르거나,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는 화염이 갑자기 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괜스레 부끄러움을 느낀다.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밥을 먹고, 옷을 사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해도 되는 걸까?


<>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유태인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아버지 앞에 설 때면 언제나 수치를 느낀다. 슈피겔만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는데,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다. 전쟁이 끝나고 아내와 미국에 온 그는 아들 아트 슈피겔만을 낳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수용소의 경험은 그에게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며 매사에 편집증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을 보인다. ‘친구들이 괴롭힌다는 아들의 말에, 걔네들을 먹을 것도 없이 방에다 일주일만 가둬두면 친구가 뭔지 알게 될 거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이는 아트 슈피겔만(아들)이 젊은 시절 겪는 방황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매우 답답하고, 편협하고, 이중적인 인물(아우슈비츠에 갇혔으면서도 흑인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버지가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어린아이가 된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생존자가 느끼는 수치심에 다름 아니다. 아버지의 수용소 생활을 만화로 그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그는 괴로워한다. 또한 너무나도 편협한 아버지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고집이 그를 살아남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한다.


그것은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윤리적 당위와 인간은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해라는 생존의 욕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인간인간 같지 않은 인간사이에서의, ‘인간-인간사이에서의, ‘지옥을 경험하지 못한 자지옥을 경험한 자사이에서의 고민. 이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인간-인간앞에서 일방적으로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츠라는 -인간의 경험 앞에서 인간의 경험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극단이 바로 죽은 자인데, 말 그대로 죽은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자, -인간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존재 일체를 무화無化한다. 내가 돈을 벌수도 있을, 결혼을 할 수도 있을, 더 살 수도 있을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동시에 내가 세계적인 석학일지라도, 세계 제일의 부자일지라도 죽음은 무조건 들이닥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Nichtung’.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심연에는 바닥없음ungrund’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즉 인권선언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인간은 고귀하지도, 법적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도 않는다. 근대의 인간규정에서 벌거벗은 자연 생명(조에zoe), 즉 출생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바로 권리들의 원천이자 담지자로 등장”(<호모 사케르> 249)하지만, 이는 근대국가가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국가의 인권 규정에는 출생이 즉각 국민이 되며,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없다는 허구가 내재되어 있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즉각 다시 사라져버리는(또는 결코 그 자체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시민의 토대인 한에서만 인간에게 부여된다(또는 인간에게서 생겨난다).”(같은 책, 251)


세월호를 지켜보는 우리의 본질 역시 아무것도 아님이다. 우리는 옷을 차려입고,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정치적 토론을 하지만 실제 우리의 본질은 이고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세월호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인간인척 하는 나아무것도 아닌 나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존재물음을 망각한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치부를 보이는사람과 그 치부를 보는사람은 동일한 나이다. 나는 보이면서 보는 자,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자이다. 여기서 수동적 나(보이는 나)와 능동적 나(보는 나) 사이의 일치가 일어난다. 보는 나(능동적 나)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치부를 노출하고 있는 나(수동적 나)라는 사실 때문에, 실상 보는 나(능동적 나)’볼 수밖에 없는 나(수동적 나)’가 된다. 나는 내 수동화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노예로 만드는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 앞에서 수치에 몸부림친다.


세월호와 제천, 밀양 화재 사건을 통해 단순한 진영논리의 대결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근본적인 조건 그 자체 말이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내 안의 비주체를 억압하고 망각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면 개선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스템이 잘못되어있다면 고쳐야 할 것이다. 다만, 시스템을 고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어떤 문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곁에 남아있을 거라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물론 세월호 희생자들 앞에서 어른들이 미안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런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희생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것은, 우리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너희들을 죽게 만든 이런 세상을 만들어놔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가 똑바로 정치인을 뽑고 사회 시스템을 잘 만들어놨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틀렸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사고는 일어나고, 무고한 희생자들은 생겨난다. 그건 특정 계층이 노력을 안했다거나 잘못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근원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에는 진보의 신화가 놓여있다. 악과 투쟁하여 악을 물리치고 선의 세계를 세운다는 신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악당 박근혜를 탄핵시키면 무언가 세상이 달라질 것처럼 떠들어대던 인간들은 제천 화재사태 앞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 갑작스럽게 천년왕국이라도 완성될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물론 그들에겐 아직 변명거리가 남아있다. 이명박과 박정희의 망령들, 꼴통 노인세대와 전세계의 적 미국이 여전히 건재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악을 퇴치하면 선이 달성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의 구호, “어른들이 미안해의 밑바닥에는 진보의 신화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놓여져 있기도 하다.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헤겔을 필두로 근대 문화가 그리스 비극을 해석하고, 또 부수적으로는 자신의 내밀한 모순을 해석하는 창 역할을 하는 형상이 바로 죄 있으나 결백한 사람이다.”(<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144-5)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처럼 자기 아비를 죽였기 때문에 유죄라고 할 수 있으나, 의도한 것이 아니기에 자기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동시에 그 사고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유죄인만큼 무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흐림과 동시에,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한다. 나는 내 잘못도 아닌 죄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이면서 동시에 고귀한자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모델은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사죄할 때 자주 쓰는 모델이다. 전범국의 후손세대들이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혹은 자기 자식의 죄를 대신 사죄하는 부모와 비슷하다). 자신들의 죄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 나치의 잔당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런 사죄방식이다.


어른들이 미안해라고 외치는 이유가 자기애 때문인지, 진영논리를 공고히 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칙적으로 우리가 세월호 아이들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없다. 아니, 정 미안해하고 싶으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들과 하루 2천원으로 살아가는 폐지줍는 노인들, 결식아동들에게도 똑같이 미안해해야 맞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다국적 기업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도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을 나의 죄로 내면화한 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논리적 귀결아닌가? 세월호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인간의 삶에서 떨쳐낼 수 없는 부조리함, 그리고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에서조차도 막을 수 없는 대표의 허상성’(유권자에 의해 뽑힌 대표가 유권자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으리라는 허상)이지 어른들의 잘못같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