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1937년 상하이(금주법 시대의 시카고 뺨치는 혼돈과 범죄의 도시)를 배경으로
마약거래 등 이권을 두고 다투는 중국인 갱단인 청방 조직들과 일본 야쿠자, 비밀종교단체와 이에 휘말린 조선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현재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일하는 조선인 경찰인데 일본 교토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공부한 전직 학자이다.
이 주인공이 상하이의 악에 휘둘리며 악전고투한다는 내용이다.
소설 첫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런 시공간에 안내되었을 때 느끼는 흥미진진함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풍부한 배경묘사와 디테일이 좋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어가면서 많은 결점을 보게 되었다.
우선 문장력이 아주 실망스럽다.
이인화의 소설을 처음 읽어보는데, 이 사람이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였다니... 싶을 정도로 조잡한 문장과 횡설수설이 자주 출몰한다.
하드보일드 장르소설이라면 예술적인 문장엔 관심이 큰 없이 건조한 문장으로 빠른 전개를 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나름 문학성을 불어넣는답시고 늘어놓은 작중 화자의 사고와 지문과 환상성 표현 등에서
난삽한 횡설수설, 꼬인 문장, 잔뜩 꾸몄지만 빈곤한 사유, 상투적 표현들을 많이 드러낸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같은 유려한 문장과 서정성, 위트를 담을 수 없다면 간결하게 쓰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가독성도 좋아졌을테고.
상하이의 시대상과 구체적 디테일을 시각적으로 정교하게 그린 것은 좋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보다는 참고서적의 힘이겠지만.
그러나 잡스러운 부수적 내용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
항우와 우미인 이야기, 삼국지 조조 이야기, 단테의 신곡에 대한 언급, 중국 고전 문헌들 이름 열거, 초기 기독교에 대한 언급...
작가는 소설을 풍부하게 만들고 교양성도 내세워 폼을 잡고 싶었는지 몰라도, 소설의 전개와 주제의식에 필연적 관련이 없는 디테일들은 소설 분량 뽑아내기 목적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그리고 스토리를 예측불허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전개가 너무 너저분해졌다.
외국 장르소설들에서 여기저기 따온 설정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일단 핵심설정인 주인공의 해리성 인격장애와 기억상실부터 큰 설득력이 없고 작위성만 도드라진다.
그냥 이야기를 꼴 수 있는대로 꼬아보자는 욕심으로 만든 억지 반전들이 너무 많다.
이러다 보니 찬찬히 읽어봐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주제를 말하고 싶어했던 건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장르소설이라도 줄여서 3-5문장 정도로 요약가능한 가시적인 주제는 장악해야 하는데 말이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주인공의 행동동기가 약하다는 것이다.
니힐리즘에 빠진 무기력한 공무원에 불과한 주인공이 거악과 음모에 휘둘리며 치고박고 힘겨운 싸움을 하는데
왜 이런 투사로 돌변해서 승산없는 싸움을 해대는지 동기가 미약하다.
아내의 실종사건이나 학문적 동료의 폭행사 같은 이유를 집어넣고 있지만 아무리 꼼꼼히 읽어봐도 그 정도로는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추리과정이 허술하다.
주인공 머리 속 섬광이 번쩍하기만 하면 사건의 내막, 자신의 정체성, 역사적 사실, 문헌의 진실성 등의 난제가 아하~ 그거였구나! 하고 간단하게 해결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물론 이 소설의 핵심 설정이 주인공의 정신분열과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주인공이 경찰이라면 수사과정을 통해 발견한 단서를 보고 분석과 궁리 끝에 깨닫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의 만능 두뇌에 불꽃만 한번 튀기면 다 해결된다는 설정은 안이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소설은 몇년 전에 읽은 장용민의 '불로의 인형'과 비슷하다.
중국 역사가 중요한 모티브이고 한중일 삼국인이 뒤섞이며 액션장면이 많이 나오는 점에서...
불로의 인형에 비하면 이 소설의 퀄리티는 실망스럽다고 말해야겠다.
상상력과 설정의 자연스러움, 문장력과 가독성,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솜씨 면에서 불로의 인형이 훨씬 낫다고 본다.
2004년에 나온 이 소설은 이인화 작가가 이런저런 문학적 회의감에 시달리며 소설쓰기를 오래 쉰 후(게임 시나리오, 영화 시나리오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고 함)에 낸 소설인데
작가후기나 출간 당시 언론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컴퓨터 게임 폐인이 되었음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게임과 맞붙었을 때 경쟁력이 있는 소설을 목표로 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설정과 반전의 재미로 돌아가는 소설을 썼는지 몰라도,
이 소설의 실망스런 쿼리티를 볼 때 모름지기 소설이 게임 뒤꽁무니만 쫓아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
풍부한 디테일(게임으로 치면 정교한 그래픽)만으로는 완성도 있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세 줄 요약
1. 시공간 배경의 매력과 풍부한 디테일만으로는 소설이 성공할 수 없다.
2. 아무리 장르소설이라도 문장력과 전개의 설득력은 중요하다.
3. 소설은 게임 뒤꽁무니만 쫓아선 안 된다.
이인화는 딱 두작품만 보면됨. 영원한제국과 시인의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