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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던 나는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씻고 움직이기가 싫어 괜시리 교회와 함께 엄마가 미웠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등쌀에 못이겨 간 교회에서 먹은 국수는 아직도 간간히 생각난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공부하기 위해서 였지만 사실은 맹목적인 신앙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어릴때부터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니신 분이다. 좋게말하면 신앙에 대해서 확고하시고 나쁘게 말하면 편협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커버린 당신의 아들과 말싸움을 하는것이 일요일 아침의 풍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꽤나 관심있는 분야였고 이렇게 독후감을 작성하게 되었다.
주인공인 남형사는 동네에서 민요섭이 살해되어 수사를 맡게된다. 하지만 수사의 진전이 없었고, 남형사는 민요섭의 옛 행적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집착에 가까운 수사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서 남형사는 민요섭의 노트를 발견하게 되는데, 민요섭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가상의 인물(전설속 인물? 제 식견이 짧아서 역사에서 실존하는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설화 시킨다. 아하스 페르츠는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집트의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신들 등 모든 신들을 찾아보고 공부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문이 풀리기는 커녕 그대로 유지되고 결국 다시 방랑한다. 그러다가 아하스 페르츠는 광야에서 위대한 신성을 만난다.
"사람의 아들이여, 이제 때가 왔다. 그대의 길고 애절한 부름은 드디어 나를 무위와 무명에서 끌어냈다. 이제 그대 지혜의 독수리는 천공을 높이 날고 그 뱀은 대지를 깊이 뚫으리라."
"지난날 너는 수많은 이름으로 나를 불렀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내 여러 얼굴에 절했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모두가 이 오늘을 위함이었으니, 메마른 대지가 단비를 빨아들이듯 갈구에 지친 그대의 영혼이 보다 뚜렷이 나를 보고 보다 똑똑하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위대한 신성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하스 페르츠는 다시 길을 떠나고 자신도 모르게 한 젊은이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아하스 페르츠는 젊은이 예수와 문답을 나눈다.
"…당신은 무엇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겠소?
"모든 것이오. 저들이 필요로 해온 모든 것, 빌고 희구해 온 모든 것이오."
"당신은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만, 당신이 가진 것이 꼭 그러리라고 어떻게 잘라 말할 수 있겠소?"
"내 아버지의 지극히 크고 높으신 사랑이 뜻하신 바이기 때문이오."
"그럼, 먼저 하나 묻겠소.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이오. 당신은 이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 수 있소? 다시는 저들이 빵이 모자라 고통받는 일은 없도록 해줄수 있으시오?"
"사랑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소. 성서의 오랜 기록이니, 흙에서 빚어져 필경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한 덩이 빵으로 기를 수 있지만, 내 아버지의 입김으로 불어넣어져 그분과 함께 영원할 영혼은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내 아버지의 크고도 깊은 사랑을 단순한 물질적인 은혜로 끌어내리려 하지 마시오."
"그렇소? 여전히 그분의 뜻은 그러하오? 저들이 겪어온 그 오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오? 결핍과 갈구만이 저들 육신의 영원한 숙명이란 뜻인가요? 그 육신이야 말로 저들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명이며, 영혼을 헛되이 떠도는 망령의 신세에서 구해 주는 것, 하나하나로서는 덧없는 생사의 반복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만 전체로서는 저처럼 면면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건만‥‥."
"영혼의 삶이 더 크기 때문이오. 당신이 아무리 그 귀중함을 과장한들 바람 앞의 겨와 같고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육신의 삶이 저 영원한 참 생명에 비해 무엇이겠소? 거기다가 이제 약속의 날도 가까웠소. 머지않아 주린 자는 채우게 될것이고 목마른 자는 적시게 될 것이오. 어찌 그들의 결핍과 그로 인한 고통이 영원일 수야 있겠소?"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는 현재보다는 내세를 강조한다. 그래서 작중 민요섭과 대조된다. 작중 민요섭은 자신은 옷 한벌로 지내지만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팔아 먹을걸 주고 불쌍한 이들을 돌보기 때문이다. 즉 종교가 현실에 도움이 되는가? 라는 오래된 질문을 이 책은 다시 하고 있다.
"아직도 인간과 이 대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소? 그 독선의 말씀과 공허한 천국의 약속으로 우리를 당신들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소?"
"그렇소, 나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저들이 돌아올 것도 믿소.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내 가르침이 독선의 말씀이며, 그 약속은 공허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거요? 군중들은 감동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열렬한 동경과 기대 속에 흩어지지 않았소?" 거기서 문득 아하스 페르츠의 목소리가 격렬해 졌다.
"그것은 저들의 우둔과 절망에다 당신의 미끄럽고 잽싼 혀가 어우러져 빚어낸 일시적 현상일 뿐이오. 하지만 저들 중 몇몇은 돌아서면서 이미 깨달았을 것이오. 오늘 당신의 가르침은 인상적인 비유와 현란한 수식의 껍질만 벗기면 아무런 진리도 은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무슨 대단한 선심을 베푸는 양 진복팔단을 외쳤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참된 복일 수 있는거요? 그것은 기껏 우리들에게 부당하게 짐 지워진 불행의 자의적인 삭감, 실은 부끄럼 속에 되돌려 주어야 할 약탈물이 아닌가요? 왜 인간은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당해야만 참으로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요? 수천 년의 기다림 끝에 당신이 왔는데도 그런 고통스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내릴 참 행복은 없는가요? 그것들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자처하는 분의 선물이라면 그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요? 위로받지 않아도 되도록 이 땅의 슬픔을 모두 거두어들일 생각은 없소? 만족을 몰라도 좋으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 수는 없소? 나중에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어도 좋으니 애초에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는 없소? 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못 되어도 좋으니 따로 평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이 세상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소?(중략)"
여기서 민요섭은 예수에게 왜 우리는 부족하게 태어나서 그것을 견뎌야만 하는지 그 부당함을 호소한다. 왜 아담과 이브처럼 시험을 받게 하는지, 또한 그 시험받게 한 행위에 승복한 아담과 이브는 사실 예수의 뜻대로 움직인 인형일 뿐이고 그렇기에 오히려 예수에게 복받아 마땅하지 않냐고 열변을 토한다. 그 후 민요섭은구원이 필요 없는 세계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세계 중 후자를 만든 이유를 묻고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정말로 전자의 세계를 만들어야 했을까? 백수짓을 하면서 얻은 유일한 배움은 의미없는 나날을 보내는게 괴롭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계몽주의에 입각한 실존주의를 통해 종교를 옹호 해보려 한다. 실존주의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로 요약된다. 만약 신이 구원이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무의미하게 그저 먹기위해 일하고 죽기위해 사는 그저그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구원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남에게 선하게 대하려 노력할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책은 최근 남녀갈등같은 이해없는 증오가 범람하는 현대사회에서 나에게 종교의 의미를 되새겨 주었다.
독후감 첨 써보는데 본문 인용이 3분의2네요 ㅋㅋ 다음엔 책좀 읽어서 내용 빠방하게 채워 보겠습니다. 뻘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느 부분이 미흡한지 알려주시면 고치도록 노력하겠읍니다 ^^7
저는 중학교 3학년 시절 하필이면 천주교 영세 받은 직후에 읽었는데, 이후 성당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맹목적인 종교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죠. 나중에 조성기 <에덴의 불칼> = <야훼의 밤>, <라하트 하헤렙>, 이승우 <에리직톤의 초상> 등을 읽으면서 이문열이 민요섭을 내세워 했던 고민이 한국문단에서 곧잘 다루어지는 테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이핑하느라 고생했네 ㅊㅊ
근데 궁금한건 실존에서 말하는 '피투'된 존재의 '기투'하는 삶이란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삶이랑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실존주의는 종교적 '구원'과는 상관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자고 하는게 아닐까? 물론 키르케고르처럼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난 어쩐지 거부감이 드네
너가 실존주의로 옹호하려는게 목적으로서의 종교인지, 수단으로서의 종교인지 헷갈려. 칸트는 수단으로서의 종교를 정당화하려고 한 바 있지.(<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에서) 거기서 신은 인간의 최고선이 무엇인지 해명해주는 존재로 '요청'되는 존재지, 결코 목적으로 추구되지는 않아. 그리고 너가 만약 수단으로서의 종교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굳이 실존주의로 종교를 정당화한다는 이야기는 필요없지 않을까? 사람들은 한국의 광신적인 기독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종교집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거든.
종교집단이 지니고 있는 교리를 떠나서, 천주교와 기독교 단체가 행하는 선행까지 욕하는 사람은 잘 없어. 그리고 개인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종교를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번에 정신과 갔더니 의사가 나한테 교회다녀보라고 추천하드라ㅋㅋㅋ 뭐 여튼 개인적인 생각이야. 글은 잘읽었음.
gksrud// 개인에게 그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문열이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책들 추천 고맙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많은지는 몰랐네요 ㅎㅎ
밑줄충// 피투된 존재의 기투 하는 삶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목적을 정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신이 존재하고 정말로 구원이라는게 있다면 대부분의 우리는 구원을 향하리라고 생각해서 이리 적었습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도 이길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신다면 당연히 거부감이 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분은 아마 정신적으로 건강하시고 긍정에너지를 뿜뿜하시는 분이라고 생각되네요 ㅋㅋ 부럽습니다
밑줄충// 제가 옹호하려는건 아마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인거 같습니다. 맹목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저는 그다지 옹호하고 싶지도, 하지도 못할거 같아서요 ㅋㅋ; 쓸데없는 내용을 집어넣은 것은 저의 글솜씨 부족 문제인거 같습니다.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가져오지 않으면 리뷰를 적지 못할정도의 식견부족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ㅠㅠ..
여기에는 적지 않았지만 소설에는 조동팔이라는 민요섭의 열렬한 추종자가 나옵니다. 고등학생때 민요섭을 만나 부모의 고리대금을 돈도 받지 않고 탕감해주며 민요섭을 따르고 교회를 다니는 이들에게 위선자라고 욕을 합니다. 작중 마지막즈음에 민요섭이 다시 교회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에 조동팔은 울며불며 매달리다가 결국 민요섭을 살해하게 됩니다. 이 조동팔은 마지막에 독극물을 마시며 남형사에게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지요. 물론 그것이 죄의 뉘우침 따위가 아닙니다. 조동팔은 죽기직전 민요섭이 만든 아하스 페르츠라는 인물의 '교'에 절망한게 아니라 민요섭에 대해 절망했다는 말을 합니다. 이문열은 조동팔을 통해 신도들이 신을 만들어 간다고 주장한걸까요? 아니면 한 개인에게 구원의 짐이란 너무나 무겁다고 말하는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서 독후감에 내용을 포함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여러분들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자유경쟁을 통해 효율적으로 재화분배되고 성장하고 이런게 경제학 진화론 논리고 적자생존 도태되지 않으려고 열심히살고 진화하고 이런게 거시적으로는 좋은데 미시적 개인한테는 지옥같죠 승리자는 소수일뿐이니 신이 이기적이라서 효율적 전체를 만들려고 개개 인간에겐 시련을 주셨나보네요 그럴거면 인간은 그런 신을 왜 존경하고 믿어야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