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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투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라도, 심지어 사회가 없는 세계에서는 더더욱 삶은 투쟁이다.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투쟁을 배제하기 보다는, 우리들의 사회가 어디까지 얼마나 투쟁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박성민 비서관의 임용, 그 전에 있었던 인국공 사태, 그보다 훨씬 전에 있었던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분노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학벌주의는 심각한 문제다. 공부도 키와 외모에 못지않게 선천적이나 국가에서 시스템으로 줄을 세워 버린다. 자신 이상의 대학은 경외시하며 자신 아래의 대학은 사람 다닐 곳이 못 되는 학교를 만들고, 500점이 합격선이라는 이유로 499.5점을 노력하지 않은 탈락자로 만들어버린다. 스스로의 적성으로 자신의 학교와 과를 선택하기보다는 점수에 맞춰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때로는 이곳에 원서를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 치욕으로 느낀다. 그리고 이 학벌주의에서 나온 능력주의 또한 우리 사회의 그늘이다. ‘그러게 수능을 잘 보던가라는 노력-보상의 시발점은 20대 이상이 진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과시한다. 학교와 출신, 그 외에 셀 수도 없고 셀 이유도 없는 기준으로 판판이 나뉜 청년들은 다른 청년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 토익 400점도 합격할 수 있는 파이가 넓은 사회 이전에 토익 950만 합격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스스로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청년들아. 더는 자신의 모습에서 괴물이기 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우리들아. 이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이전 세대보다 똑똑하고 다음 세대보다 현명하다고 느끼는 어느 세대의 미처 피어나지 못한 현재의 청년들에 대한 무지의 결과물은 아닐까?

형법에는 과실범의 공동정범이라는 개념이 있다. 여러 명이 작당하지 않고 개개인의 과실이 합쳐져 발생한 일이라도 그 결과가 예견될 수 있다면 다 같이 짜고 친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여지가 있다. 개인의 과실=공동의 고의라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30여 년 전 만 해도 과실범의 공동정범은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941021.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지성인인 대법관들은 부실공사를 한 사람, 관리 감독에 소홀했던 사람, 이를 묵인한 사람들에게 고의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해야하는, 도저히 국민의 법 감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과실범의 공동정범은 그제야 빛을 보게 되었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였을 때에도 과실범의 공동정범은 당사자들을 처벌하는 중요한 법리가 되었다.

이제 당신들, 청년들을 괴물로 만드는 사회에 우리를 몰아넣은 윗세대들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첨단의 첨단, 끝의 끝, 1등을 모아놓은 사람 중 다시 1등에게만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고 나머지의 모든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당신들. 그리고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청년이면 그럴 수 있다는, 제 딴에는 재치만점이라는 생각하나 실상은 잔인할 정도로 무책임하게 발언한 당신들. 또한 이런 사회는 안 된다고 장외에서 한탄만 할 뿐, 우리를 괴물의 영역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저 바라보기만 한 당신들. 당신들에게 나는 고의가 없었다라는, 씨알도 안 먹힐 만한 변명으로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고 항변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대단하다. 가붕게, 헬조선과 같은 청년의 자조적인 삶과 공정성의 말살을 상징하는 단어의 시조격인 이태백, 삼포세대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2013년에 발간되었다. 그리고 우리 청년들의 문제점을 그 어떠한 책보다 잘 이해하고 있고, ‘아프니까 청춘이다같은 허구에 가득한 위로의 책들에게 노력이 결실을 가져다주지 않는 사회에서 노력하고 그렇기에 아프면 성공한다통렬한 비판을 날린다. 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청과 용산 참사가 인권적 기준으로 타당하냐는 고찰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합리적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였기 때문에 합리적이다라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있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에서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끌려 다니고 당하고 살 수 밖에 없는 20대 청년들을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비유하며, 실질적으로 행동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선배 세대들에게 제발 청년들의 아픔과 모순을 생각해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든다. 8년이 지난 지금, ‘기회는 평등한가? 과정은 공정한가? 결과는 정의로운가?’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괴물이 될 시간을 너무나 충분히 준 것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의 위로는 필요 없다. 당신들에게는 위로할 자격조차 없다. 이제 당신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쟁사회와 그것을 뛰어넘는 부조리에 단련되어 괴물이 된 우리가 모든 세대를 잡아먹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들의 몸뚱이가 먹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 성수대교의 피의자들이 무죄판결의 법리가 나오냐면, 형법 19조에는 독립한 행위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가 발생하였을 때, 그 행위의 원인이 판명되지 않은 경우 각 행위를 미수로 처벌합니다. 따라서 피의자들을 고의가 아닌 과실로 보고, 이를 다시 미수로 처벌하여야 하는데, 과실의 미수는 벌할 수 없으므로 무죄, 불가벌이 됩니다

*쓰다보니까 그라데이션 분노가 된 것 같습니다

*시간을 내주시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