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픽션들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술적 리얼리즘의 시초라 한다. 사실적인 서술처럼 위장하나, 내용은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문학 전개 방식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이 사람한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사람 책은 읽다 덮었지만.
피터 게이의 <모더니즘>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에 관한 대목이 기억난다. 거기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예로 들며 모더니즘의 폭풍이 점차 끝나가고 새로운 문학적 사조가 등장하지 않을 때 즈음 마술적 사실주의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피터 게이가 말하는 모더니즘 예술은 대충 내적 탐구, 새롭고 놀라운 형식, 비타협적인 완강한 철학 등의 특징을 가지는데, 그는 마술적 리얼리즘도 모더니즘에 포함시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도 어느 정도는 모던하다 할 수 있을 듯하다.
반면 이 책의 해설에서는 이 책이 모더니즘을 끝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더 이상 새로운 형식이나 사조를 만드는 것이 제한된, 메마른 우물 같은 문학계에서 과거의 것들을 이리저리 차용하고 재해석하고 유희하며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것이 이전의 모더니즘 문학들과는 다르기 떄문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이 책은 등장했을 당시 전에 없던 새로움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내용은 형이상학, 과거의 문학, 미학 등 온갖 학문에 걸친 다양한 과거의 자료들을 이리저리 섞어 환상적으로 빚어낸 수프 같다. 전통으로 만든 비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 느낀 것은, 사실 요즘 많이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지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감정에 있어서도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생생함을 잘 모르나 보다. 죽음과 사랑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흥미로운 지적 탐구임과 동시에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색다르고 매혹적인 스토리로 가득하다. 특히 공포는 픽션들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감정이다. 영화에서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올 때 느껴지는 공포가 아닌 미지에 것에 대한, 궁금함에 끌려들면서도 두려운 코스믹 호러와 같은 공포. 작가는 이러한 공포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글의 형식도 독특하다. 이 책은 허구의 작품이나 역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나 기록을 다룬 단편들이 많다. 흥미로운 형식이다. 굉장히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체로 되어 있지만 웃기는 비유와 풍자가 많다. 가짜 백과사전, 가짜 비평문, 페이크 다큐멘터리 등의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내가 더 똑똑했으면 더 깊이있게 읽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책의 다양한 단편들을 통합하는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원론 또는 일원론, 유물론 또는 관념론 등 대비되는 사유 방식을 차례대로 깨부수는 사례를 문학으로 표현하며 진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무언가를 알고 있기는 할까? 우리가 아는 방식과 반대되는 가상의 사례나 연구 자료를 제시하며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부순다.
지적 호기심에 적당한 미스터리를 섞는 것이 주요 전개 방식인데 호기심을 해결하기보다는 질문을 증폭시키는 데 글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대부분 아이러니로 결말을 맺는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미로에 갇힌 사람들.
미로는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그의 미로는 목적지와 입구가 존재하고 왼쪽 벽을 따라 걸으면 나갈 수 있는 미로가 아닌 목적지도 입구도 없으며 때로는 벽도 없는 그런 미로다. 누구는 이 두 미로의 차이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단편 대부분의 결말에는 뚜렷한 자기 확신과 해결이 없다. 결말은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다른 문학이나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특히 몇몇 단편들은 왠지 코엔 형제 영화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아마 코엔 형제가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2. 고도를 기다리며
믿음에 대한 이야기 / 사뮈엘 베케트
예전에 한 번 읽다가 뭔 개소린지 모르겠어서 덮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볼 만 했다. 출간 당시에는 전위적이었을 것이나 지금 보면 그렇게 전위적이지는 않다. 부조리함이 극을 통해 드러나지만 이야기 구조가 완전히 해체됨으로써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전통적인 방식의 진행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다만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극을 이룸으로써 부조리함이 강조된다. 흥미롭긴 하지만 이 책에 영향을 받은 수 많은 이야기를 이미 읽어서인지 참신하진 않았다. 이게 원조라는 사실은 그럼에도 놀랍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들은 언제부터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엄청 오래 된 것 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어제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알고 보니 몇 달 전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 오고 가는데 어디에서 어디로 오고 가고 왜 가는지도 모른다. 극 중 아무도 모른다. 밤이 되면 고도가 보낸 소년이 고도는 오늘 못 오고 내일 올 것이라 말하는데 그게 영원히 반복되었고 또 반복될 것처럼 그려진다. 그들은 고도가 안 오면 자살할 거라 말하지만 자살하지는 않는다. 고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는 자신들이 왜 거기 있는지 까먹는 바람에 종종 그곳을 떠나려 하지만 떠나지는 않는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는 않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장난을 치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벌인다. 아무도 그들을 그곳에 가둔 적이 없지만 사실상 그들은 갇혀 있다. 그들이 스스로를 가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들을 몰래 가둔 건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 장소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절대 떠나지 않으며, 기다림을 지쳐 하면서도 기다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것이 오면 모든 것이 바뀔 거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고도가 오지 않을 것과, 오더라도 별달리 바뀔 것이 없다는 것을 독자는 누구든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이 이야기가 삶과 묘하게 닮아 있다는 것도.
무엇을 믿는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특히 종교가 힘을 잃은 현대 시대에선 이 말이 사람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믿는 것이 그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 책의 두 주인공처럼, 사람들은 때로 기묘한 것을 믿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는 돈을 숭배하고, 섹스를 숭배하고, 무신론을 숭배하고, 기독교를 숭배하고, 건강을 숭배하고… 그러한 믿음에 적당한 근거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꾸며내고 갖다 붙힌 것이다. 현대 사회가 그러하지 않나…? 각자 모두 믿음을 갖지만, 그 믿음에 근거는 없다. 전지전능한 신은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무지한 인간들이 다만 믿는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이미 주어진 이유가 아닌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이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는 믿음은 수없이 생성되고 확대된다.
생각해 보니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들의 믿음이 자리한 근거에 대해 별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내지 않고 그냥 믿으며, 그들의 행동은 근거에 대한 탐구가 아닌 믿음이 실현되기까지의 지루한 과정을 버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근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너무 오래 믿어서 믿음이 몸에 굳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들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의 근거가 죄다 허상이라는 진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위협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묻어두는 것 뿐이다. 삶의 부조리함을 장난질로 버텨내며 믿음이 실현되기만을 바라기에도 인생은 바쁘기 떄문이다.
굿굿 잘 읽었음. 보르헤스와 베케트 닮아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다른 분위기의 작가들이네…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성과 포스트 모더니즘적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같아. 아마 그의 글이 현재까지도 후손에게 전해져내려오는 불멸성에서비롯된 듯. 코엔 형제는 생각을 못했네… 난 크리스토퍼 놀란이 생각났음. 여러 모티브가 실제로 보르헤스에서 따왔기도 했으니. 알단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