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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여기 우리 마주>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손보미 <해변의 피크닉>

한정현 <쿄코와 쿄지>

위수정 <풍경과 사랑>

장류진 <미라와 라라>

박서련 <그 소설>

서이제 <벽과 선을 넘는 플로우>

손원평 <타인의 집>


…쓰고나서보니 엄청 많이 읽었다. 

그래도 시대적 흐름이라고 해야하나, 문학적 사조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긴 한 것 같다.

박서련 작가가 초청 특강에서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찌질 서사”가 그것이다.

페미니즘, 퀴어, 소수자, 약자, 사회참여 등등의 수식어를 다 걷어내고 남는 것은 찌질함의 감수성이다.

흔히 우리가 불만을 갖는 겉절이 문학의 주인공들의 협소한 시선이나 편향된 공격성의 본질을 ‘찌질’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어디서 온 걸까? 그러니까, 왜 문학은 찌질해졌나? 이후로는 온전히 내 사견일 뿐이다. 


문학을 ‘현실을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는 행위’로 받아들이자. 이 프리즘은 만든 사람에 따라 볼록하거나 오목하거나, 또는 희박한 확률로 편평하다.

즉, 문학 시장의 공급자는 ‘프리즘’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수요자는 ‘프리즘’을 이용해 세계를 조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보통 이 시장의 공급자는 한때 수요자였던 사람들이다. 즉, 세계를 프리즘을 통해 보는 것에 익숙해진 이들이 곧 그것을 만드는 이들이 된다.

세계를 직시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사람들은 얼마간 ‘보통에서 벗어나는 관측’을 제공한다.


이 관측들, 그러니까 ‘이상 현상’들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담당해왔다. 주류 서사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주류 서사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어왔다. 즉, 힘은 오직 힘에 의해서만 변화되어왔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집권 이전까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이 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면서 문학은 ‘찌질’해졌다. 

왜냐하면 소수 의견은 보통 다수에 의해 비정상, 탈보편의 일탈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즉 비정상이 정상이 되면서, 탈보편이 보편이 되면서 정상과 보편을 살아가는 우리의 앞에 ‘찌질’의 서사가 대두한 것이다. 


씨발 술먹고 써서 그런가 1도 말이 안 되는 것 같네. 이만 죄와 벌 재독하러 간다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