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나는 대장선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빌었다. 무엇을 향해 빌었는지, 나는 빌고 있었다. 바다는 문득 고요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칼의 노래> 중




 1.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은 '무패의 신화, 백전노장' 등의 묘사와는 거리를 둔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어머니의, 아들의 죽음에 괴로워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잠시 연을 맺은 여인의 죽음에도 몸부림 치는 사내다.

광기어린 일본군과, 징징이 임금과, 깽판치는 명나라 원군과, 동요하는 부하들과, 정처 잃은 동물에 가까운 백성들과 싸워야 하는 장군이다.

기나긴 소설 전체에서 그는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김훈은 기어이 소금창고에 들어가 숨죽여 우는 '영웅'을 만들어냈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은 '구국의 성웅'이라기보다는 '전쟁의 피해자, 익명의 개인'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내적/외적 전쟁을 '극기'의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내다 소임을 다하고 스러진다.

나는 그에게서 서양의 '스토아 철학'의 서릿발 같은 정신을 본다.


 2.


어릴적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철학자 흉내가 취미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런 사람이 제위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제국의 운명이 한 사람에게 달려있었다.

그에게 가해진 책임과 업무는 상상만 해도 아득하다.

가혹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그는 '일기'를 택했다.

이성의 힘으로 고난에 맞서는 내용이 모여 <명상록>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동양의 '선비'정신 또는 '군자'의 모습을 본다.


 3.


두 인물은 전쟁통에서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들의 일기는 역사에 길이 남는 문학이 되었다.

'유학'이든 '스토아'든 두 인물은 사실상 같은 철학, 같은 정신을 지녔던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에 엉터리같은 인간이 너무나 많아서 나는 누군가를 존경하기가 힘들었다.

존경심은 가슴에서 절로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둘을 '존경'한다. 그리고 이들을 '연민'한다.

나는 존경과 연민이 함께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