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뒤 상대방과 반상 위에서 다시 복기를 한다. 수준급의 바둑기사들은 대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둔 수를 재현할 수 있다. 몇 백 수나 되는 대국의 전체 복기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둔 수 중 이유 없이 두어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실험 하나가 있다. 체스 경기 중 한 장면을 체스기사와 일반인에게 보여준 뒤, 방금 본 체스판을 그대로 재현해보라고 했을 때에는 체스기사가 압도적으로 잘 기억해냈지만, 체스규칙과 무관하게 장기말들을 올려둔 뒤에 보여줬을 때는 체스기사나 일반인이나 엇비슷하게 기억해냈다는 것이다. 결국 무질서하게 벌어진 사건들을 내 인생에서 의미있는 사건들로 만드는 것은 사건 그 자체의 성격(장기말 하나 하나)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내 인생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체스판 위에 규칙적으로 놓인 장기말들)이다.
그런 면에서 <만인보>는 놀라운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총 편수는 4001편이고 등장하는 인물은 5000명이 넘는다. 그토록 많은 인원들을 시집 속에서 재배열 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물론 그가 그려낸 인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이 균형잡히게 재현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그야말로 일생동안 사력을 다해 살아온 사람만이 가능할 터이다. 되돌아보면 내 인생 중 상당 부분은 텅 비어있다. 그저 막연하게 그때 무언가를 했었지라는 기억만 날 뿐, 어떤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 시간이 많다. “난 뭘 한거지 대체?”
사건 자체의 성격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말은 꽤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라도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냐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으며, 그 당시에는 좋아보였던 일도 훗날에는 내 인생의 오점이 될 수도 있는 것(가령 이혼하게 된 사람이 결혼식을 떠올릴때라던지)이다. 여기에 바로 ‘성장’이라는 인간 고유의 신화가 담겨있다. 고난과 역경마저도 모두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성경에서부터 이어져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경험했는지가 아닐 것이다. 그 경험들을 내 인생 전체에서 어디에서 배치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벤야민이 말한 '성좌(星座)적 역사관'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작위적으로 놓여져 있는 별들 사이에 선을 그음으로써 별자리가 만들어지듯이, 나의 경험들 역시 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별자리로서 인식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선을 긋느냐는 것이다.
아 참고로 이건 고은 성추행 사건 터지기 전에 쓴 글. 고은 성추행 사건에 대해선 걍 잘 터졌다라는 생각뿐...
굿굿 다른 리뷰도 해주라
솔직히 나 만인보 존나 잘읽었음 개명작이라 생각함 - dc App
175.223//감사합니다! 많이 읽고 리뷰 꾸준히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75.197//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ㅎ 읽으면서 눈물도 흘리고 감탄하기도 하고 ㅎ
네이버 자일리톨님이시군요ㅎㅎ
만인보 쩔져
오우 굿굿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