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 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는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널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시집 <사슴>에서, 1936 -





- 백석의 시는 길게 서술하는 듯하다가도 짧은 호흡의 시구를 섞어 내달리는 문장에 매력이 있다.

 외형면에선 기형도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둘 다 어리고 가난한 시절을 시의 자양분으로 삼는 공통점이 있다.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말의 진수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름답다가도 아련해지는 시다.

 내 생각엔, 기형도의 시는 외국어로 번역해도 그 맛이 살아날 테지만,

 백석의 시는 번역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고유의 맛이 있다.

 여하튼 우리 시는 두 천재가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