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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칼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는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 시집 <화사집>에서, 1941 -
-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시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그대로 읊었다.
시인의 음과 양은 우리 시의 역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아직까지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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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1948 -
- 서정주보다 두 살 아래인 시인의 시는 간결하다.
또 내면적이다.
두 시인의 동명의 시를 같이 읽으면 우리 시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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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시집 <세기말 블루스>에서, 1996 -
- 서정주, 윤동주와는 또 다른 자화상이다.
서정주의 '팔할의 바람', 윤동주의 '파아란 바람'이 오늘날의 시인에게로 와서 '저녁 바다'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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