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의 책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2010 -
-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책들을 읽는다.
또 글을 모르는 우리 어머니처럼 단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어떤 이는 흰 것 위에 검은 얼룩이 있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검은 것 위에 흰 얼룩이 있는 책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책들은 어찌어찌 해석을 당한다.
그러나 겉장이 떨어져나가고 제목도 없는 나라는 책은,
일평생 읽어도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해석하려 대화를 한다.
그것도 어려우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조금씩 해석되어 가기도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