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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서문 1부(펜데믹 시대의 증상들) 2부(급진하는 정치학의 미래) 결론(알지 않으려는 의지)로 구성되어 있음.

2019년부터 2020년12월까지의 시간동안 쓴 책으로 보이는데, 이 기간동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지젝 본인의 정치,철학적 스탠스를 보여줌. 어찌보면 그동안 여러 저작에서 평소 하던 얘기를 이 사건들을 통해 다시 풀어내는 느낌이 좀 강했음.

그렇다고 정치얘기만 주구장창 하는건 아니고 코로나와 연관된 사안들 예를들어 `마스크쓰기 vs 마스크거부, 봉쇄vs 일상 경제활동 재개` 같은 코로나로 인해 벌어지는 쟁점이라던가, 팬데믹으로 인해 변해버린 비대면 일상과 업무로 인한 이슈들과 뉴럴링크 스크린뉴딜 코로나 시대의 섹스에 대한 고찰들 뭐 이런 얘기들도 다룸.


아 그리고 지젝이 아감벤을 까는데

일단 서문에서 아감벤 `얼굴없는 인간`에서 쓴 시를 불러와서 배틀을 벌임.

"자유가 폐지되었다/ 의료라는 명분으로/ 이제 의료가 폐지될 것이다. / 인류가 폐지되었다 / 생명이라는 명분으로/ 이제 생명이 폐지될 것이다." - 아감벤

이걸 비틀어서

"의료가 폐지되었다/ 자유라는 명분으로/ 자유가 폐지될 것이다./ 생명이 폐지되었다 / 인류라는 명분으로 / 인류가 폐지될 것이다"
이렇게 디스함. 끝날때 까지 아감벤을 후드러 팸. 잊을만 하면 꺼내서 깜..


다시 책 ㄱㄱ

1부

"팬데믹이 표면 아래에서 항상 끓고 있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갈등을 표면화 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펜데믹은 시간이 갈수록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둘러싼 전망을 충돌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러저런 사건들 통해 사유하고 이야기하는데 1부는 전체적으로 논리적 연결성이 떨어짐. 1부 내에서도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각 장에서도 전체 주제와 멀어지기도 함. 그렇게 삼천포로 빠지면서 지젝 본인의 스탠스를 계속 보여줌.

암튼

코로나 바이러스의 통계수치에 집중하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암,환경오염,굶주림,무장투쟁,가정폭력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코로나는 통제가능할것이지만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는 전지구적 동원체계가 절실하다며 툰베리를 칭찬.

BLM운동을 옹호하면서 때떄로 폭력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관대함을 보여줘야한다고. 그러면서 PC적 열정은 신보수주의식 사상통제와 흡사하다며 인종차별과 반페미니즘 자취가 어느정도 발견되는 모든 저자를 파기한다면 남아나는게 없을거라며 데카르트의 예를 들며 PC를 조금 깜.


또 벨라루스나 홍콩의 시위는 서구 자유주의 언론의 지원을 누리는 서구 따라잡기식 시위로서 이 따라잡기는 쉬워도 이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으며 이의 실패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약점을 표현한다. 유일한 대안적 선택은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이지만 위험이 따른다. 또한 이들이 따라잡으려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서구는 후기 자본주의적이고 후기 자유주의적인 시대, 즉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로 불리는 상황에 집입 중이라는 조짐이라 함.


뉴럴링크에 대해 `내 마음을 읽는 기계는 곧 내 마음을 통제할 수도 있다`. 펜데믹으로 공동체 생활에서 거리두기로의 단순 전환이 아닌 친밀성과 거리두기의 한 양상이 다른 양상으로 복잡하게 변화. 펜데믹 이전 공동체 생활과 사적 영역간의 취약한 균형은 새로운 양상, 즉 사회적 의존과 통제에 관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양상으로 대체. 뉴럴링크의 전망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고립되어보호막 거품속에 살아가며 동시에 동일한 내면의 공간을 공유하는 새로운 사회비전과 이상적으로 합치한다.


스크린 뉴딜에 대해선. 비접촉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특권을 누리는 이들이 또한 가장 많은 통제를 받는다. 정부와 기술 거물들 간의 협업체에 그들의 생활전체가 투명하게 공개되며, 학교 병원 경찰 군대등 존재의 생명줄인 네트워크들이 민간 기업에 손에 들어가게 되어 국가 안보 기구와 결합해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데이터를 검열 조작하거나 차단 가능하게 될 것. 이들을 비영리 공익 사업체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없다면 우리 공통 영역의 기본 요소가 민간의 통제 아래 놓여 민주주의는 사실상 파괴 될 것. 또한 스크린 뉴딜은 간호사나 배달원 같은 caretaker계급의 가시적 역할을 최소화 하려는 계획, 이들은 반격에 나설 것. 그리고 스크린 뉴딜의 종착점은 뉴럴링크 같은 형태일 것. 마치 매트릭스처럼. 비접촉의 미래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아니며 세계의 또다른 종말은 가능하다.



2부

팬데믹으로 인해 일상의 붕괴는 대타자의 해체로 정신병적 신경쇠약을 야기한다며 예전의 일상성으로 돌아가려는 꿈은 꾸지 말고 그렇다고 집단적 정신 존재라는 새로운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려는 꿈도 꾸지 말자며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개별 육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차원에서 싸움에 임해야 한다고.


전 지구적 차원의 연대와 계급분화(가난)이라는 팬데믹을 동시에 공격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팬데믹을 봉쇄할 수 없다고 주장. 원리적으로는 쉽다며 의료보장 시스템 구조조정을 통해 가능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요소로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와 더불어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후자는 격리와 봉쇄에 대한 거부, 즉 변화에 대한 거부라고 언급하며 이를 무시하는 일은 집단적 정신병과 다르지 않다. 현재 일상으로의 복귀를 요구한다는 건 바이러스라는 실재를 정신병적으로 폐제(foreclosure)한다는 뜻이라며 일상으로의 복귀는 결국 최고의 정신병적 제스처인 집단 광기의 조짐이 되어간다고 진단.

정신병적 폐제는 팬데믹에 맞선 유일한 대응이 아니며 헤겔의 화해(reconciliation)는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행위의 비극적 차원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언급하며 러시아 공산주의자들도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원하지 않았고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연합을 만들었지만 2차대전이 벌어졌으며 오이디푸스 부모도 어떤일이 벌어질이 알았지만 재앙은 그들이 그것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며 우리가 팬데믹과 싸우기 위해 취하는 조치들이 의도와 달리 새로운 재앙을 배태할 가능성을 경고한다.



우리가 정말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와 같은 일이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 현재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코로나 위기를 통제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 핵심에서 희생을 요구한다. 이윤을 곧바로 소비하는 대신 재투자를 하며 완전한 만족은 영원히 미뤄진다. 자본가는 행복이 아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쓰지만 이 희생은 그 자체로 경험되지 않고 감추어진다. 나중의 이윤을 위해 지금을 희생한다.

우리는 경제를 위해 지금 우리의 목숨을 희생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보다 훨씬 더 갑작스럽게 죽음에 노출되는 방식으로 일상의 삶이 전환되는 이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없을것. 이 전환은 자본주의를 기능할 수 있게 만드는 끊임없는 지연되는 향유의 논리를 약화시킨다.


진정한 변화에 오르는 길은 오로지 우리가 시스템 내에서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 열린다. 폭력이라는 `산통`없이는 권력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이양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 민주주의적 대화와 변화의 규칙이 정지되는 긴장의 순간은 언제고 도래할 것.


탈인간(포스트휴머니티)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낡은)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런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는 의학적이거나 경제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이며 우리는 사회적 삶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발명해야만 한다.



결론

피히테를 불러와 현재 전 지구적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경제의 재정치화라는 피히테의 프로젝트가 그 어느때보다 더 중요하다고.

자유주의의 상업적 무정부상태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우리가 기대고 있는 객관적 질서처럼 보이는 교환의 세계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할 자유이다. 필요한 일은 경제의 재정치화다. 경제생활은 공동체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통제되고 규제되어야 하지, 맹목적이고 혼란한 시장 세력들 간의 상호 거래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피히테는 우리의 자유가 객관적인 시장 메커니즘의 제약을 받는 사회적 삶의 교조적 잠에 빠져 있다고 보았고, 그로부터 우리를 깨우고자 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자유가 불평등, 대다수의 부자유, 그리고 국제관계에서 냉혹한 경쟁과 식민주의 또한 양산한다는 점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배경을 이루는 적대와 위기의 난맥상은 팬데믹의 딥 웹과 같이 단순한 사회적 분석만으로도 풀릴 수 있지만, 팬데믹이 촉발한 초월적이고 존재론적인 재난은 다크 웹과 같이 우리 대부분은 알 수조차 없는 영역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그 자체는 `명시적 꿈텍스트` 즉 미디어가 초점을 맞추는 지점, 모두가 떠들어대는 대상(꿈)으로서, 그저 실제 현상에 불과하지 않고 환상적 연계의 대상, 꿈과 공포의 대상이다. 오늘날 팬데믹은 주인 기표 혹은 우리 사고의 폭군(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이다.

이 주인 기표는 그 `꿈 내용`을 이루는 서로 연결된 일련의 현실적 삶의 사실과 과정 전체에 의해 중첩 결정된다. 팬데믹과 관련되어 이 사태를 한꺼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원인(자본주의,기후,중국,음모)은 없다. 그렇다고 다수의 과정들이 우연적으로 중첩 결정된 결과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 다수의 원인들로 환원 불가능하다.


라캉은 우리가 잠에서 꺠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계속 꿈을 꿀 수 있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팬데믹의 `자명종`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병리적 행동들을 불러 꺠우는 일에 봉사하는것도 진실이 아닐까? 이것이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가정폭력과 같은것의 발생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팬데믹 이전 우리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진짜 현실에서 꿈꾸고` 있었고, 팬데믹에 대응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데올로기적 현실로 깨어났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꿈은 현실과 단순 대립하지 않고 그 꿈들은 현실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이 환상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리고 환상이 우리가 실재에 직접 압도되지 못하도록 막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면,

그때는 현실 그자체가 실재와의 만남으로부터의 도피로 기능할 수 있다.


지젝은 뉴라이트 포퓰리스트들과 몇몇 좌파들의 태도에서 드러난 팬데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광범위한 거부에 대해 진단한다.

코로나를 사유하길 거부하는 대부분의 형태에서 무지가 특별한 내부자의 지식이라는 적극적 형식을 상정하며, 또한 코로나에 관한 앎을 막는 지배적 형식 중 하나는 직접 부정이 아닌 물신적 부정의 태도이며,

과학 그 자체가 통합되어 있지 않고 내재적 한계들 떄문에 반성적 절차의 기능이 없기에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선행전제와 함의에 관해 충분히 성찰할 수 없고 보는덴 동의 하면서도 코로나 시대에 과학을 믿지 않으려는 마스크를 쓰라는 의무에 항의하는 분노에는 아무런 긍정적 해방의 잠재성도 없다고 본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는 의지가 팽배해지는 건 권력자들이 피억압자의 지식을 조작하고 제약한 결과로 환원될 수 없다며, 사람들이 온전한 진실을 무시하는 까닭으로 실존적 불안 때문이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무지에의 유혹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팬데믹을 생화학적 건강 문제만이 아닌 자연에서 인간이 점유하는 위치와 우리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성에 뿌리를 둔 어떤 것으로 사유함으로써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상성을 만들어내는 결정을 할 것인가를 물으며 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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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형 결혼 여러번 한건 알았는데 세번째 결혼이 30살 연하랑

무려 란제리 모델출신이라고..

그러니 책 읽으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