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 시집 <풍장>에서, 1995 -
-1982년 월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한
무려 70편에 달하는 '풍장' 연작시의 시작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장대한 시다.
친구 김영태, 마종기와 함께 김수영을 따르던 청년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변함없는 시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바람 같은 유연성을 지닌 시인의 시는 우리 시의 모범 그 자체다.
노년이지만 혹 새로운 책을 내지 않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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