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돈키호테 1,2를 읽고



8hvIEgJuHtrDI1gW1dUTq5LBRC5jUJPwPbZrGU8mawIRKnOtGOBjcem8uUCn-1G41n-raDCD-rbhZirk94vtcCtUrPFLkgNB88spDoMocPqRDGWCIHPDvn4Ih1DcERYe1rGIiUzv



콘텐츠 대홍수의 시대다. 플랫폼과 콘텐츠 제작 도구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컨텐츠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콘텐츠 소비자는 쏟아지는 컨텐츠들에

둘러 쌓여있다. 파이가 커져 좋은 콘텐츠의 양도 늘었지만 그 점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형편없는 콘텐츠들이 훨씬 더 많다. 소설 <돈키호테>는 그 당시에

(17세기 스페인) 범람하는 기사도 소설이라는 콘텐츠에 파묻혀 지내다

광기에 휩싸이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다.


1cZ-KJjppMrRKnkTvROolVwanA95SoalAtEeJCn1fvadcp_pTcSn_dBlTnwiRX_4Vskn3W3ntHKxd6Z0eKZ86Frz8pV0BVtTw3orVSE9jOikEbcRU90Dq3Frl4ydZ2wC0KxCkody

귀스타브 도레의 ‘서재의 돈키호테’ (1862년)


헤비 콘텐츠 유저인 돈키호테가 분별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콘텐츠의 세계에 흠뻑 빠져 현실의 세계와

콘텐츠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광기는 400년을 뛰어넘어

메타버스(metaverse. 현실과 가상이 융합된 세계) 라는 개념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콘텐츠의 대홍수 속 현 인류는 자발적으로 돈키호테가 되려하지만 엄연히 차이가 있다.




iI2RtULH1Z-7Ot2k0K33067FLg7E8-Avrb8nNj3D5_zWeT1dk_p-cvTJwwY8yesjcAmeiZyLo73t5Z_bRjDJhv0Uew-5yFQsfk2NkYXOTIlZTvitREN6wFVXmv_5DCFAIKreNY4t







돈키호테가 빠진 메타버스는 ‘기사도 소설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있지만

현재와 근미래의 메타버스의 컨텐츠는 여러개의 범주라는 점이고

돈키호테는 컨텐츠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현재와 근미래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메타버스에 탑승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이 가장 큰 차이일텐데 돈키호테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겨우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별하게 되었지만 근 미래 인류는 자신이 원할 때

메타버스에 탑승하고 하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먼 미래가 되면 어나더 라이프에 아예 정착할지도 모르지만)






dA6mlj7qRvg3enlnyZ4CJEDIBsndvyrFnZIlQLJlq1jBa3D1dqyliQ8iD0S0R5Kh4oqiiqQyu8lN83q6_UORX7U8Oy7vgRb133_IBfVULoNzv6PuvLwSSq7cIHltwOIiJkoCc9L7


두드러지는 차이가 있지만 돈키호테의 광기를 통해 현 인류가 메타버스를

경계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보다

자신의 믿음 쪽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인지 부조화’ 현상이 마음 속에 싹틀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오락적 재미를 위해 메타버스에 탑승해 그 세계관이

현실과 매우 흡사하더라도 현실의 세계관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wA-sG11oO9asDV845WhVRkcAmrDosvDmDP0nhpxF7xXFYpepzI50jwi1i4oK2quIeNiM0gEoG6eJBfNrqyrT40pXaR4GtE0riX9pW9K1Qq-QTV7jD7Br0l9rGxj24NZVQGbApyRt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위해 용감하게 뛰어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분명 어느 정도 산초처럼 현실적인 것만 생각하고 겁에 질려 당나귀 뒤에

숨어사는 것 같은 이들에게 즐거움와 감동과 자극을 준다.

그 고결한 가치는 그대로 두고 이 소설이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가 여러면에서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인 만큼

돈키호테의 광기가 죽음 앞에서 사그라들고 현실과 가상세계를

마침내 구별하게 되는 마지막장이 감동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RZQTzuOl5697EFO6XoXvI6Cxsizcel2OiYVy-q6U3DA22_VgD2nOJRXFpvJ97UCaaMEjEKw5-RhHH4PZilk7Pw07pwGpq1Az4CR1ZsnzjpMN--0fEsPs1ub0X0o9i7IqXMqrayLp



가상세계와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자 그는 매우 현명하게 말을 한다.

자신이 바보스러웠다는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상세계에 심취해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 때는 모든 것을

자기만의 세계관대로 보기 때문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MfseXdTSGPdtHxA3CgvXLBWNVpadCUQtr_GySKAZ5_mscxD_Fohwsb6WRSf3DsQYD4cVR0WMfzcrnMa8IBQeJkrfXaODSVtuivuBT-co0141TK6-pC8eH4-lSrAO4TXNReKmlkU7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화’에서 동굴의 갇힌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그림자’이고 ‘실체’를 보아야한다고 하지만

돈키호테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굳게 믿는 세계꽌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소멸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cSzLgETpM7LVsqM3yd7qHBiNAp-iaHN8fwSZqo6Ow06qNn2vW2pqeV-XsyE2YL0vQaopkCgnjfu7dZr7lEtqhexifC-k6KGeAmr4AFG490QSAip7DJnqCB848lUKFqXX5Lxzh0t



돈키호테가 자신의 가상세계의 명예와 기사도 법칙들을 숭배하듯이 인류는

돈,명예,권력,국가,주식,비트코인 등 개념화된 무형의 것들을 숭배하고 따른다.

그렇다고 그 개념을 의도적으로 전부 버리고 문명화된 사회의 기준으로

야만인이 된다고해서 진짜 현실과 인공된 세계관으로 얽혀있는

가상 세계를 구별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념화된 세상을 인식하며 사는 것과 무지한 채 맹목적으로 사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념화된 세상을 인식하지 않고 무지하다면 문명사회의 개념화된 것들을 무시하고

야만인이 되어도 또 다른 개념들을 만들고 맹목적으로 숭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23jgoAg9CZp_ewDRCNQOm_iSnCxgtIFwfmEXlPMpJ-dgJEqzXHUIidSa7ruLAiVPB8yCCVOHXQ4ukGdd6dwsIUl9O9QEVYE-VnmQeuDPu5mlnkF5sc8L4eAYrAkeIAlivl9Eot8


(출처 : 알렉스 룽구 유튜브)



MN9Uv1ulSppYj_CdwoAdawDGXeC_wXglqFD6Oaf0t2Ufgx2ak1kPcjIlg2xDfH2DTaVCn_ZJqc1Juixb359QPoXhsslWLmoenIg-brcPWLYQbfNVHIjQAlLNYLuUMU07578IDSBC


메타버스에 올라타게 되는 원인을 파헤쳐보면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돈키호테는 패배로 인한 1년간의 칩거 조약을 기사도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요양한다. 기력까지 쇠해진 돈키호테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닫혀 버린 것이다.

욕망을 억제당한 것이 돈키호테의 가상 세계관을 깨뜨린 것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cDmDUQjkqq4OZuka2JGfT8E-wl8uBpnscueO2acdnp7DSKGkKMB8vxbQcZ_WmU9DJLyR0NC5eoltAuK45jX-QPZ_S7qh1WX7gPSdS6AvQAWpgE6YUdC6EmvmKu2lf2cvlWZtd8qs



그것은 바로 산초처럼 자신을 ‘진짜 현실’에 데려 오려고 애써준 주변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다. 바로 이 점이 가장 감동스러운 지점이었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굳건하게 믿었던 세계관을 버리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전부 인정하고 감사함을 표시했다. 제정신이 들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됐는지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제정신이 들게 됐는지의

순서는 세르반테스만이 알 것이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은 돈키호테의

좁고 강박적이고 무모한 가상 세계가 무너지고 더 큰 세계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그는 유언으로써 주변인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자신의 크나큰 즐거움이자 전부가 되버렸던 기사도소설 콘텐츠를 경멸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는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리고 반복되고 집착하면

그 욕망은 증폭된다. 그 욕망은 진짜 현실과 거리간 먼 가상 세계로의 탑승권이 된다.

돈키호테가 기사도 소설을 경멸하는 것은 자신의 헛된 욕망을 경멸한 것이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b86fa11d02831d16706cea37200d6da918d798472dc62e6806caa3270a6561c4d26d1a68bbab368988388498282b6e940297e423ed0c1d1b6




돈키호테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