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단계 - 철학자들의 니체
박찬국 - 니체를 읽는다 중 3장
니체의 해석이 얼마나 갈라져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책임.
아예 둘이 정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흔하다는 게 여기서 나옴.
많은 해석가들이 번역이 없다. 그들의 해석을 알고 싶으면 이 책밖에 없다.
이 뒤에 수많은 갈래가 나오고 그에 대한 책이 나올 것이므로, 이 책으로 준비했으면 함.
박찬국 - 하이데거의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읽기
이 책은 굉장히 좋은 책이다.
하이데거의 "숲길"의 이 부분을 안 읽는다던가, 아니면 하이데거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해도, 이것은 읽는 게 좋다.
하이데거는 시인이나 예술가로 많이 취급받은 니체를 엄연한 형이상학자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 하이데거의 생각과, 니체의 사유와 그의 아이들의 해석을 아주 쉽게 설명했다.
이 책의 1장은 니체의 철학을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중심으로, 매우 탁월하고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
2장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요약한다.
그가 이 시대가 니힐리즘이라는 것에 그대로 동의하면서도 왜 어떤 부분에서는 니체를 비판했는지 보여준다.
Branch 1. 실존주의
대중적으로 니체는 실존주의적 해석에 가장 끈끈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관련된 책을 읽어봤더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니체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츠 하이네만의 "실존철학"에서는 많은 실존주의자들을 다뤘지만 니체는 빠져 있었고, 월터 카우프만이 실존주의를 다룬 책에서는 니체 파트를 넣었으면서도 강의록에서는 "엄밀히 말해 니체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실존주의"라는 용어가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만큼이나 모호하다.
자신이 직접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한 카뮈나 하이데거를 교과서에서는 실존주의자로 다룬다(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그래서 힘들다. 판단할 수 없다. 실존주의라고 말하는 걸 무시해선 안된다.
사르트르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무시하기엔 너무 유명한 책이다.
정영도 - 야스퍼스 vs 니체
야스퍼스는 확실하게 니체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접근하기 어렵다.
야스퍼스의 "철학"은 너무 어렵다. 야스퍼스의 "니체와 기독교"만 봐서는 야스퍼스와 니체의 관계를 보기 어렵다.
야스퍼스가 "니체"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이 책은 번역이 안 되어 있다.
이 책이 야스퍼스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책이다.
이 책 이후에 야스퍼스의 니체 해석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성과 실존"이란 책이 가장 좋다.
사르트르 - 자아의 초월성
(사르트르 - 존재와 무)
"존재와 무"를 읽고 싶다면, 혹은 "존재와 무"를 읽지 않고 싶다면, "자아의 초월성"을 읽는 게 좋다.
"존재와 무"는 어렵고, 현상학을 많이 차용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책이 전혀 니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자아의 초월성"도 현상학적인 설명이 있으나, "존재와 무"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다.
"존재와 무"에서의 타자론과 같은 핵심 주제가 "자아의 초월성"에 전부 들어가 있어서, 마치 요약본 역할을 한다.
"존재와 무"를 쉽게 읽기 위한 길이 어떤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월터 카우프만 - Existentialism from Dostoevsky to Sartre)
(월터 카우프만 -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이 책들은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았다.
Existentialism from Dostoevsky to Sartre은 영미권에서 굉장히 유명한 책이다.
Branch 2.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니체가 재평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가 1936년부터 1946년까지 쓴 니체에 대한 강의록과 논문들이 1961년에 출간되면서 현재 니체가 받는 평가의 토대가 되었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이 네 가지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니체는 시인이나 예술가라기보다, 철학자, 형이상학자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굉장히 중요한 형이상학적 용어이다.
셋째,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을 극복했다기보다 서구 형이상학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넷째, 니체 같이 존재를 허구적 가치로 보고 망각하기보다, (나처럼) 존재에 귀를 기울어야지만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
첫째 해석은 하이데거 이후의 모든 해석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둘째 해석은 출간된 이후에는 주류 의견이었으나, 니체 유고의 가치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점차 늘어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비형이상학적 해석으로 인해 현재 완전히 받아들여졌다기에는 거리감이 있다.
셋째와 넷째 해석은 니체를 비판하는 것이라 큰 논란을 불어일으켰다. 특히 셋째 해석은 니체의 철학을 전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라 하이데거의 제자들조차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를 철학자로 되살리는 데 아주 큰 기여를 했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후의 Branch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위에 제시한 박찬국의 책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이데거 - 숲길 중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그가 이 글을 쓸 때는 그의 후반기로,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니체를 해석하지 않았을 때였다.
이것은 오히려 장점이 되어서 그의 완숙해진 이론들이 잘 드러난다.
하이데거의 1차 저작 중에서 "숲길"이 가장 쉬운 편이니, 시간이 된다면 다른 글도 둘러봐도 된다.
하이데거 - 니체와 니힐리즘 or 하이데거 - 니체 2 중 제5부 "유럽의 니힐리즘"
(하이데거 - 니체 1)
30년대에 그가 한 강의록은 61년도에 "니체"로 출간되었고, 이는 "니체 1"과 "니체 2"로 나뉘어진다.
"니체 1"은 예술, 영원회귀, 인식과 같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하여 니체의 사상을 파악한다면, "니체 2"는 니체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니힐리즘과 그의 극복 방법에 대한 분석과 동시에 니체의 방법에 대한 비판을, 하이데거 자신의 극복 방법 제시를 하고 있다.
"니체 1"은 니체를 설명하고 있고, "니체 2"는 니체를 분석한 뒤 비판하는 것이다.
박찬국은 "니체와 니힐리즘", "니체" 둘 다 번역했는데, 박찬국은 일단 "니체 2"의 "유럽의 니힐리즘" 파트가 중요하다고 봐서 그것을 먼저 번역해서 "니체와 니힐리즘"이라 책으로 내고, 그 뒤 시간을 들여서 "니체 1"과 "니체 2"를 전부 번역했다.
그래서 "니체와 니힐리즘"과 니체 2 중 제5부 중 하나만 읽어도 상관이 없다.
만일 "니체"를 보고 싶다면 제 5부를 먼저 본 뒤에 "니체 1"을 읽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니체 2"의 제 5부 뒤는 강의록이 아닌 논문이라 어렵기도 하고 일관성이 떨어져서 차트에 넣지 않았다.
하이데거 - 사유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글을 통해 근대인이 거의 사유를 하고 있지 않음을 밝힌다.
한나 아렌트가 생각난다.
기자와의 대담에서 기자가 "존재와 시간" 이후 가장 중요한 작품이 뭐냐고 했을 때 이 책을 골랐을 정도로 하이데거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책이지만, 많이 어려운 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석은 어찌저찌 소화할 수 있는데, 그 뒤에 고대인의 사유를 알기 위해 파르메니데스를 꺼내들고는, 하이데거 특유의 방법으로 해석하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어렵다.
니체가 초기 문헌학 시기에 파르메니데스를 가리켜 "가장 반그리스적인 철학자"라 호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컬하다.
솔직히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추천하고 싶었다. 하이데거와 후설의 수제자였던 오이겐 핑크의 "니이체철학"이 그것인데,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의 니체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니체의 유희적인 면을 강조해 "놀이" 개념을 니체에 도입하고 니체의 비형이상학적인 면을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에선 거의 읽을 방법이 없다. 한국어로 하기락이란 사람이 번역을 했다고는 하는데, 책을 찾을 수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과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세 곳 모두 다 이 책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례는 처음이었다.
일단 서울에 있는 공립도서관에는 전부 없고, 대학교 도서관을 일일히 찾아보니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도서관에는 이 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천하기는 곤란했다.
Branch 3. 들뢰즈와 프랑스들
들뢰즈는 니체가 재평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가 1962년에 출판한 "니체와 철학"은 프랑스 철학계를 주로 하여 퍼진 니체 르네상스의 시작점이 되었다.
들뢰즈가 특히 비판하려고 했던 네 가지 니체의 오해는 다음과 같다.
"(1)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 (힘에의 의지가 '지배욕'을, 혹은 '힘을 의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
(2)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서(어떤 사회체제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갖는 자가 그 때문에 강한 자라고 믿는 것).
(3) 영원회귀에 대해서(영원회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 고대 인도인들, 바빌로니아인들 등에서 빌린 낡은 이념이라고 믿는 것).
(4) 니체의 마지막 저작들에 대해서(이러한 저작들이 지나친 것이라거나 혹은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것)."
들뢰즈는 니체를 "능동과 차이의 철학자"라고 해석했다.
들뢰즈는, 셋째 오해에서도 보다시피, 영원회귀를 세상 전체가 다시 반복하는 것이라 보지 않았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상에는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이 있다.
반동적인 힘은 오직 능동적인 힘에 반응하여 나오는 것이고, 자신의 용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어에 의존할 뿐이라고 보았다. 반동적인 힘은 진짜 힘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영원회귀가 일어나면 오직 능동적인 힘만이 다시 반복되고, 그 능동적인 생성을 긍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영원회귀란 선택적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바로 "차이"의 강조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영원회귀란 것은 낡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인 것이다. 마치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 세상이 변화한다는 사실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계속 생성을 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힘만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에 더해 니체의 윤리학적인 면에서도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을 도입했다.
"카운터컬처"라는 말은 분명 현재 문화에 반대한다는 것이지만, 니체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현재 문화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카운터컬처는 문화라는 용어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아주 반동적인 용어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힘을 가진 주인의 도덕과, 반동적인 힘을 가진 노예의 도덕을 똑같이 이렇게 볼 수 있다.
주인의 도덕은 용어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주인의 도덕은 자신의 힘을 정립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기존의 가치를 공격한다.
그에 반해 노예의 도덕을 가진 노예는 오직 부정밖에, 용어의 부정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용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을 정립하는 데 부정만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기존 가치만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그렇게 악이라 평가함으로서 자기 자신도 악이라고 평가한다.
이렇게 니체를 능동과 차이의 철학자로 해석하면서 들뢰즈는 니체의 말 하나를 아주 중요시했다.
"우리는 강한 자들을 약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만 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각각 능동적인 사람과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꾼다면,
이 강한 자라는 것을 능동적으로 자기 도덕을 만들어내 가치의 전도를 이끄는 마치 혁명가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약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가 딱 들어맞게 된다.
들뢰즈 - 들뢰즈의 니체
들뢰즈가 해석한 니체를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책은 "니체와 철학"이다.
이 "니체와 철학"은 좀 어려운 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먼저 읽으라고 하고 싶다.
"니체의 철학"은 논문이었지만, "들뢰즈의 니체"는 강의록이었고, 그로 인해 들뢰즈의 다른 저작과 비교하여 매우, 매우 쉽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들뢰즈 - 니체와 철학
현재 나오는 웬만한 니체 해석은 다 이 책에서 나와서, 설명할 것이 없다.
제1장과 제2장이 읽기 어려운 편이므로, 칸트를 비판하는 제3장과 양심의 가책을 분석하는 제4장부터 읽은 뒤 "들뢰즈의 니체"와 함께 제1장부터 다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클로소프스키 - 니체의 악순환
하이데거의 "니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이후로, 니체를 최종적으로 복구해내 니체 르네상스를 절정으로 이끌게 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해석가들은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가장 중요한 용어로 보았는데, 이 책에서는 이 힘에의 의지라는 용어를 억제하고 그 대신 충동과 환영이란 단어를 앞에다 두었다.
충동은 힘에의 의지를 대체하는 용어이다. 지성이나 언어가 아닌, 신체 중심의 사유를 뜻한다. 충동은 "악순환"이라고도 불리는데, 지성을 거부하고 충동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람은 신체와 정신이 병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소프스키는 이 때문에 니체가 시달렸던 질병들을 분석한다.
환영은 사람이 충동으로 자극되었을 때 나오는 강박적 이미지를 말한다. 사람들과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환영을 언어로 설명하려 하지만, 충동은 언어를 거부할 때 일어나기 때문에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클로소프스키는 말한다. 니체의 가장 강한 환영은 영원회귀이고, 이는 학문적이기보다 실스 마리아에서 겪은 체험에 가까웠다.
영원회귀는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인데, "신"을 죽이기 위해, 현재 사회에 남아 있는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영원회귀로서 자기 자신을 해체하고 동일성을 상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클로소프스키는 이를 다신론이라 한다).
(이 다음 내용은 클로소프스키의 다른 책들을 참고했다)
클로소프스키는 과학을 포함한 니체 당시의 모든 문화가 진리보다 동일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충동 중에서도 니체가 말한 약자의 군중의 충동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니체는 이것에 대항하기 위해 충동 혹은 악순환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음모론을 제시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니체는 이런 음모론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지만, 현대 산업 사회에서 그러한 음모론의 시뮬라크르(클로소프스키의 또다른 용어이다. 패러디라고 생각하자)가 나타났고, 이것이 꼭 니체가 대항하려 한 "문화"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클로소프스키는 그 뒤 "La Monnaie vivante"라는 책에서 리비도적 충동으로 이루어진 현대 문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클로소프스키는 이 책을 들뢰즈에게 바쳤고, 들뢰즈는 극찬했다(내가 보기엔 그의 "의미의 논리"에 큰 영향을 준 거 같다). 푸코도 클로소프스키만큼 대단한 해석을 한 사람은 없다고 했고, 리오타르도 자신의 철학에 이 책을 인용할 만큼 프랑스철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책이다.
많이 어렵다.
(들뢰즈 - 차이와 반복)
니체만을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지만, 이 책에서 가끔씩 영원회귀를 언급할 때 "차이의 형이상학"과 같이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둘러볼 만 하다.
들뢰즈의 니체 해석은 현재 수많은 니체 해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차지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도 니체의 모든 부분을 해석해낼 수는 없다.
영미권에서 니체를 해석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그의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고명섭의 "니체 극장"에서 들뢰즈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네하메스의 "니체: 문학으로서 삶"도 들뢰즈에 대한 하나의 반발이라 볼 수 있다.
Branch 4. 푸코 - 인간의 죽음
이 Branch부턴 니체의 해석보단 니체를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즐거운 학문 125에 나온다.
그리고 즐거운 학문 343에 그 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 글은 길기 때문에 인용할 수 없지만, 그게 좀 이상하다는 것은 밝히고 싶다.
그 설명에서 그는 신이 죽었다는 것을 리처드 도킨스 같은 방식처럼, 일명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글에 대한 보다 더 비슷한 표현은 "신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다"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푸코는 어떤 개념에 있어 부정하기 위해 증거를 찾으려 하기보다, 시대를 분석하면서 그 개념이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사라질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미셸 푸코 - 말과 사물)
보편적이라 생각했던 인간과학의 지식들이 사실은 시대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그는 "에피스테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아프리오리", 혹은 더 단적으로 말해 "패러다임" 같은 것이다.
예전 패러다임에서 생각한 것을 패러다임이 달라진 지금 똑같이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말과 사물에서도 비슷하게 말하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지금은 "인간"이라는 개념이 부각된 에피스테메에 있다고 하며, 이런 인간의 개념과 그에 따른 학문적 관점들은 그 이전 에피스테메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푸코에 따르면 니체는 인간 개념이 너무 부각되었다는 것을 본 선구자이며, 니체의 뜻을 따라 "인간의 죽음"이 곧 올 것이라 말한다.
푸코는 이 책을 기반으로 "인간"을 기반으로 둔 학문을 공격하는데, 실존주의도 그런 학문 중의 하나이다. 니체에 대한 또다른 해석의 충돌인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고고학"이라 불리는 방법론이 많아, 많이 역사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그 내용 중에 마지막에 나오는 일부분이기 때문에, 안 읽어도 된다고 보았다.
(들뢰즈, 가타리 - 안티 오이디푸스)
이것은 읽을 만한 책이 아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이것은 어렵지만 읽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죽음을 긍정하고, 인간학이 아닌 인간공학이란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는 면에서 푸코를 따라간다.
하지만 결정적인 면에서 니체와 푸코와는 다른 이론을 내놓고 있다.
니체는 인류의 역사를 분석하며 좋음이 고대 그리스에서는 "고귀함"을 뜻했지만, 2천년간의 시간을 걸쳐서 현대에는 "금욕적 이상"을 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푸코는 각각 알키비아데스와 "너 자신을 알라"로 대표되는 "자기 수양"과 "자기 통제"가 고대 그리스에는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교 이후부터 자기 통제, "너 자신을 알라"만이 강조되었다고 말했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분리를 비판하며, 그런 둘은 양립이 가능하거나, 같은 것일 수 있으며, 이러한 아스케제(자기수련)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야 인간의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영성 관련 사람들과 그런 이론들을 아주 많이 인용하며, 그것이 이 책을 더 어렵게 만든다.
Branch 5. 푸코 - 계보학
(노엄 촘스키, 미셸 푸코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촘스키와 푸코가 TV에서 했던 토론과 함께,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집과 강의록을 담은 책이다.
내가 원하는 글은 이 중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 부분뿐이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약간 니체 식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그 어느 경우든 정의라는 개념은 계급사회에서 억압받는 계급이 자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 혹은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촘스키와 푸코는 처음 갈릴레이 부분에서는 거의 같은 의견을 가진채 토론보다 대화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푸코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둘은 갈라졌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자가 제한하면서 빠르게 끝나게 되었지만, 푸코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꽤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푸코의 이 말은 정의를 모두 버리라던가, 정의에 대한 지식 자체를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푸코는 권력의 체계로부터 정의를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지만, 정의의 권력을 각종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로부터 떼어낼 수는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도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푸코 - 감시와 처벌
뭔가 설명을 하고 싶지만, 너무 유명한 책이라 설명을 꼭 할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 알아서 보자.
(푸코 - 생명관리권력의 탄생)
토마스 렘케 - 생명정치란 무엇인가
"감시와 처벌"에서 잠깐 언급한 "생명관리권력"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들이다.
생명관리권력의 탄생은 그가 한 강의록이고, 생명정치란 무엇인가는 푸코와 푸코를 따라간 다른 철학자들의 생명정치의 논의를 다룬 책이다.
생명관리권력의 탄생은 신자유주의에서 드러나는 최근의 권력구조를 다루니만큼 20세기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것을 감안하고 읽는 것이 좋다.
꼭 읽을 필요는 없지만, 이 책은 왜 니체가 현재 사회를 비판하는 데 영향을 주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감시와 처벌"에 대한 질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푸코의 하나의 답변이라 볼 수 있을 "주체의 해석학"을 읽는 것도 괜찮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어 biomass 같이 푸코의 영향을 받은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5. 한계]
"대체 여친은 어떻게 사귀는 거냐?"
"그냥 너 자신이 되어서 네 모습대로만 해!"
"나 던파 하루에 10시간 한다는 거 알려줘도 돼?"
"아니... 그렇게 하지 말고... 그냥 취미가 있다고만 해."
"아니 이게 내 모습인데?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거야?"
"너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그런 거 말고. 진짜 너다운 모습을."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그냥 너를 보여주라고! 너다운 모습을 보이는 게 여친을 사귀는 방법이야."
여친을 사귀고 싶은 위의 사람은,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을 것이다.
친구가 너 자신이 되라고 하더니, 진짜 내 자신이 되려고 하니 친구는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는 "진짜 너다운 모습"을 보여주라고 한다. 그게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친구는 정말로 그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
여친 사귀는 법을 알고 있다면 친구는 정말로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게밖에 말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야스퍼스는 니체를 이런 방법으로 해석했다.
니체의 글에서 하나의 주장을 찾으면 정확히 정반대인 주장을 다른 니체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쪽으로 니체를 해석한 사람과, 정확히 정반대로 니체를 해석하는 사람 사이에 합의는 커녕 그 어떤 곳에서도 화합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자기모순과 해석에 대한 저항은, 니체가 말하려던 주제 때문에, 인생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야스퍼스는 말했다.
전에도 언급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 크로산은 그의 책에서 "신학자들의 니체에서 벗어나고 역사적 예수의 흔적을 모아 분석해서 예수를 제대로 해석하려는 것도, 사실은 하나의 재해석에 불과하다"라 말했다.
이 플로우차트도, 역사적 니체와 철학자들의 니체를 분리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도 하나의 재해석에 불과할 것이다.
진짜 니체, 역사적 니체를 보려는 사람은 어쩌면 이 글을 거부할 지 모른다. 진짜 니체를 위해선 재해석을 부정해야 한다 생각할 지도 모르고, 내 글은 재해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철학자들의 니체도 열어두는 사람만이 이런 재해석에 긍정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니체 해석일 것이다.
나는 해석 중에서 또다른 니체의 아이들이 한 해석 하나를 언급하고 싶었다. 하지만 체계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플로우차트에 넣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다.
이 Branch의 이름은 "문학에서의 니체의 아이들"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밀란 쿤데라이다.
그가 가진 예술론의 관점을 다룬 책으로 "배신당한 유언들"이 있다. 이 책을 이 글에 맞게 요약하겠다.
"카프카는 친구에게 자기 글들을 다 불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친구는 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미완성인 글을 출판했다. 친구는 그의 유언을 배신했다. 카프카를 배신한 친구는 잘못을 한 것일까, 카프카를 이 위치로 만들었으니 잘 한 것일까? 인문학자들에 있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이 둘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배신당한 니체를 주목해야 한다.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칭하지 않았다. 자신이 철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체계적인 이론을 거부하고 예술에서의 진리를 강조한 사람이기도 했다. 현재 철학자들은 니체를 배신했다. 그는 아주 중요한 철학자가 되었다. 철학자는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과연 철학자들의 니체만이 니체인 것일까? 니체가 원하던 것은 철학자들의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인 조르바", "데미안", "유리알 유희" 같은 소설과 예술에서의 해석이 아닐까?"
"나는 잊어버리고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것은 니체 전집 12 유고에 나오는 니체의 글이다.
이게 대체 무엇인가?
니체가 썼다는 사실은 필체로 알아낼 수 있지만, 대체 뭔 이유로 이것을 쓴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철학자였다면 그저 메모를 한 것이라고 했겠지만, 사람들은 단정짓지 못했다. 니체가 쓴 글 중 유일하게 겹따옴표를 붙여넣었던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겹따옴표를 쓰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주장이 한 데로 모아질 수 있었을까? 데리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니체의 텍스트 전체가 바로 이 "나는 내 우산을 잊어버렸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명료하고 일관적인 해석과 주장,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니체의 텍스트는 "결정 불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정의는 법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지만, 법은 정의라는 결정불가능성을 통과해야지만 존재하게 된다고 데리다는 말했다. 그렇다면, 니체의 해석은 니체의 글이라는 결정불가능성을 통과해야지만 존재하게 되지만, 니체의 글의 진정한 의미는 니체의 해석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 아닐까? 그것을 뜻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이런 플로우차트 따위론 전혀 잡아낼 수 없는 니체의 면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플로우차트와 설명이 좋다 한들 내 생각엔 절대 그것을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은 한계를 가질 것이다.
니체의 결정불가능성은 위에서 언급한 우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심연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그대 속을 들여다본다."
굉장히 유명한 이 명언은 선악의 저편 146이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생각해봤는데, 플로우차트를 보는 것만으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선악의 저편"은 다른 아포리즘으로 가득찬 니체의 저작과는 달리 어느 정도 흐름이 있다. 앞뒤를 본다면 이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145. 남성과 여성을 전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성에게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본능이 없었더라면 치장하는 재주도 없었을 것이다.
?
147. 옛날 플로렌스 소설에서, 더 나아가 인생에서, "좋은 여자건 나쁜 여자건 여자는 채찍을 원한다." 사케티, 제86호.
??????????
이 명언이 사실 여성혐오를 의미한 것인가?
사람들이 주로 하는 해석은 세 가지다.
하나는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를 사용하는 해석이다. 우리는 현대에 남아 있는 허무주의와 싸워야 하지만, 가치를 전도해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동적 허무주의여야 하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또다른 허무주의, 수동적 허무주의로 빠져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해석이 있다.
다른 하나는 차이를 사용하는 해석이다. 헤겔이 심연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무사유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타인과의 차이를 무시하는 사상과 싸우는 사람이 또 차이를 무시하는 사람이 되선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 하나는 동정을 사용하는 해석이다. 니체는 동정하는 사람들을 신보다 더 싫어했다. 동정이야말로 약자의 무기, 그리스도교의 무기라 본 것이다. 이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약자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동정하는 것을 비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괴물과 심연은 여성성을 의미하고, 여성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바라는 것 아닐까?
이것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쿤데라 얘기 댓글에서 할랬는데 본문에서 나와버리네 ㄷㄷ
정보글은 개추야
오랜만에 이 콘을 적절하게 써보는군요...
진짜 정보글 오졌다.. 니체 찬찬히 읽고 들뢰즈나 하이데거 둘 중 하나로 가지 쳐보려고 했는데 그 방면에서도 상당히 도움이 되겠네 ㄱㅅㄱㅅ 그리고 “인간적인..” 은 니체 저작 순서 중에서는 비교적 뒤에 읽는게 더 낫냐?
몰라 그거 아포리즘 덩어리라 이해 못했단 말야...
와우... 땡큐 고생했어!
개추 - dc App
쿤데라는 스스로 문학보다 철학을 즐겨 읽는다고 말한 적이 있음. 물론 철학 공부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들이 사상을 쌓아가며 펼쳐놓은 여러 아이디어들에 흥미를 느끼고 탐독한다더라. 참존가도 니체의 영원회귀를 뒤집는 것에서 시작하지. 만일 어떤 사상가의 말들이 통일되지 않는다면 이론적 정리가 아닌 한계없는 재생산도 이해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싶음.
안읽고 쭉내렸는데 플차에 있는거 다읽음?ㄷㄷ
안티오이디푸스랑 권력의지는 다 안읽음
여기 도대체 책 몇 권이 소개된 거냐.. ㅠㅠ - dc App
Branch 1 3 5가 더 중요하므로 그것만 읽고 괄호친 건 안 읽어도 되는 거니까 다 안 읽으면 10권, 한 1800쪽 정도 할 거야.
1 3 5를 강조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텐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10권? 중요한 거 10권만 꼭대기에 써주면 안될까? - dc App
박찬국 교수의 '사는게 힘드냐고-'랑 '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는 겹치지는 않아? 둘 다 읽는 걸 추천하는 거지? - dc App
겹치는 거 아님. 둘 다 읽는 걸 추천함.
ㅇㅇ ㄱㅅ - dc App
수고 많았어. 《차이와 반복》보다는《안티-오이디푸스》가 더 읽기 쉬워, 애초에 잡아놓은 독자가 다르니까. 혹시 나중에라도 도장깨기 하고 싶다면 알려줭
니체 다음으로 들뢰즈로 가지 치려고 마음먹으면(아직 하이데거로 갈지 어떨지 미정) 들뢰즈가 쓴 니체 관련 책들로 시작할까하는데 그 이후에 들뢰즈 원전은 안티 오이디푸스로 시작하는게 젤 나음?
질문)난 쿤데라 얘기처럼 달리듯 뻗어나가는 니체의 문학적 글쓰기와 여러 아이디어들을 경험하고 싶은데 그러면 니체 전집을 쭉 달리는게 나을까 그래도 플차에서 소개한 각종 해설서들도 꿰고 보는게 나을까?? 전집을 쭉 달린다면 책세상 전집 쭉 읽으면 될까?
유고가 너무 뒤죽박죽이고 마치 하나 하나가 함정에 빠지는 거 같기 때문에 차라리 읽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문학으로서의, 예술철학으로서의 니체는 거의 모르다시피 하다. 나는 네하메스 정도밖에 못 읽었다. 2차저작 중에 예술 관련된 게 있기는 한데 그걸 읽으면 나을지도 모른다. 뭐가 나은건지 난 모르겠다.
네하마스... 메모...
독갤의 신
미쳤네... 시간 두고 정독해봐야겠다.
미쳤다 진짜.. 개추
그냥 궁금해서 묻는건데.. 밑에 철학관련 념글에서 윤리학과 정치철학 차이 묻던데… 그건 어그로고 사실 철학고수세요? - dc App
사실 수학과 출신이라 수학철학이나 언어철학 과학철학 이런거에만 관심 가져서 다른 건 거의 모릅니다. 데릿 파핏이라는 철학자가 있다는 걸 올해에야 알았어요.
그러면 니체는 왜 읽었느냐, 제가 위에서 말을 좀 수정하고 싶은데 형이상학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도 좀 탐구하고 싶었는데 푸코가 권력-지식 관계란 개념을 통해 제 뇌를 이쪽으로 읽게끔 만들었죠...
수학과 출신 ㄷㄷㄷ 언젠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정리한 글을 보고싶네요! 글 잘봤습니다 - dc App
감사합니다 ㅠㅠ
혹시 니체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면 질문 하나 받아주실수 있나요?
그야말로 명문.. 마지막 문장이 좋아요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그리 안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