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스크롤 해주세요.

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만두이미지

예전에 썼던 글 올림. 한 번에 안 올라가서, 잘라서 올림.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b86fa11d02831d16706cea37200d6da918d798477dc62c92018347d828e351339dd2a29e772065c93e46a1d48a75596f8a4043074c8672177


탈언어의 미학

문학은 무엇을 전할 수 있는가?


문학은 왜 읽는가?” 문학은 본디 철학의 하위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이상 국가를 위해선 시와 시인을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문학이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칸트와 헤겔 역시 이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철학은 문학이 되지 않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서양 철학의 기조는, 개념(철학)을 먼저 확립하고 이를 문자라는 그릇에 옮겨담는게 문학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소쉬르가 일반언어학서설에서 기표와 기의를 분리해내면서 상황은 반전한다. 기표는 기의(개념)과 임의적으로 연결되고, 그렇기에 문자는 공()으로 화한다. 이 과정에서 헤겔이 이룩한 개념의 변증법(혹은 이분법)은 무너지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언어로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베케트는 말이 그를 실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데리다 역시 언어를 불신했다.” 처음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문학은 무엇을 전할 수 있는가?”


이청준은 언어에 민감한 작가다. 그는 일찍이 언어의 공성(空性)을 발견했다. “언어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일체를 비판하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언어를 모색했다. 한편, 1회 자음과모음 경장편 신인문학상을 박솔뫼의 이 수상한다. 전위적인 언어와 서사를 통해 형상화 한 자기만의 뚜렷한 문체는 어쩐지 이청준의 언어와 닮아있다. 3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각각 다른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두 답변의 간격을 비교해 봄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나는 서로 다른 두 텍스트에 재차 질문을 던져보기로 마음먹었다. “문학은 무엇을 전할 수 있는가?”


이청준, 침묵의 언어

본인은 일전에 이청준 소설의 구조를 분석하였다. 서술하는 자와 서술 당하는 자 사이에 거리를 마련하는 이른바 다층적 구조가 보인다는 점에서 위 글은 두 가설을 마련했다; “낮은 층위로 상위 층위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보여 이분법이 가지는 폭력성을 노정한다침묵을 통해 논리어로부터 대안적 언어로 전이한다이다.


그 동양적인 침묵은 때로 서양적 논리어보다 더욱 포괄적인 인식의 언어가 될 수도 있으며 소설에 있어서의 대화의 양식에서도 단회적 선택의 서양식 언어표현보다 때로 는 우리식의 그 말없음표가 더욱 더 다양한 사유와 언어선택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말없음표는 바로 그 기침소리와도 같은 언어표현 양식의 하나가 아닌가 말이다.”(이청준, 말없음표의 속말들)


하지만, “다층적 구조의 분석에는 조금 의문이 남는게 사실이다. 벌레 이야기의 경우에는 분석 텍스트로 선택한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와는 달리, 이른바 다층적 구조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벌레 이야기는 다른 두 텍스트와는 상이하다. 물론, 유사한 부분 역시 존재한다. “하느님은 전지전능, 우주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분입니다라는 칸트-헤겔적 사고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낮은 층위의 체계(혹은 논리적 체계)로 볼 수 있다. 낮은 층위의 체계가 후에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 역시 병신과 머저리, 이어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서술자와 서술 대상과의 거리감이 명백히 다르다.


하지만 그건 물론 아내가 지속적으로 신앙을 가지려는 결단의 표시는 아니었다. 다도 그것은 아이를 찾으려는 간절스런 소망의 표현일 뿐이었다.”(105)


가 아내 이야기를 전하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의 주어는 명백히 아내이다. 여기에 물론 ~아니었다의 단언적 서술은 심지어 1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서술자와 서술 대상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진 않는다.


아내에겐 그 김집사의 위로가 좀 지나쳤었던지 모른다. 혹은 아내로선 마음 속에 사 무친 원망과 저주를 죽어도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107)


이 문장에서, 모른다의 주체는 누구인가? 분명 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주체인 는 숨겨진 채다. ‘의 존재는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아내와 완전히 구분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그 아내의 절망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121)


나는 그런 아내를 알고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121 )


이 분리의 시작은, 결국 아내의 침묵으로부터다. “아내가 지금까지 내게 입을 다물어와서, ‘는 더 이상 아내의 심리를 단언적으로 표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언적 표현은, 그래서 추측의 표현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아내는 김집사 앞에서 거기까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 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므로, 벌레 이야기는 다층적 구조를 안 가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술자와 대상이 일치하는 일층적 구조로 시작했으나 기독교(논리어)의 실패와 함께 다층 구조로 분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청준이 다층적 구조를 통해 1) 논리어의 모순을 밝히고 2) 침묵의 언어로 이행한다는 가설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참고:


이청준-박솔뫼 2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300150&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