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윗 부분 생략(대략 뒤르켐과 하이데거에 대한 내용)-


불현듯 어려운 말들이 지나갔지만,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본질은 존재가능성 아래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찾기 위해서는 죽음을 개별적인 죽음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에서 피어나오는 결단성을 통해서 세계 내로 자신의 새로운 존재를 기투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러한 과정은 비유적으로 하나의 죽음이며, 실제의 죽음과는 다른 실존적 죽음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우리가 실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존적 죽음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 자살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주의는 아니지만, 그와 관련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실존주의 예술들을 살펴보자. 철학을 실제 삶으로 피상적으로 옮긴 작업인 예술은 상당히 그 사조에 관해서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이전부터 실존주의 문학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이방인’, 그리고 최근 2019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수상작인 ‘조커(2019)’를 살펴볼 것이다. 이방인은 실제로 실존주의 문학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조커는 사람마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조커를 선정한 이유로는 주인공 아서 플렉의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서 상당히 이방인과 상반되는 실존주의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우선 불후의 명작인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책은 크게 아랍인과 갈등을 겪고, 결국 살해하는 사건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여하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다. 이 부분에서 위화감이 들어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장례식이 일반적인 시각에서 소소한 일상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뫼르소의 시선에선 당신 어머니의 장례식마저 따분한 일상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소한 일상이 뫼르소 자신 스스로 죄를 짓는 이후인 두 번째부터 변한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중요하지 않은 무엇이었지만, 사형을 판결 받고, 자신의 죽음을 묵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마지막에 있어서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으며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보다 나의 삶이 더욱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 책은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만, 본고에서 생각해야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사건 이전의 장면에서 뫼르소는 어느 순간부터 총을 가지게 된다. 총이란 것은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자유를 상징하기도 한다. , 총은 죽음을 향한 자유, 자살의 도구라는 점이다. 뫼르소는 자살하고자 해변을 나갔지만, 아랍인을 보자 상당히 괴로움을 느낀다. 그 괴로움은 태양이 자신을 비추는 고통이었는데, 그 고통으로 인해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그러나 이 총소리는 한 번으로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울린다. 그는 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쏜 것일까? 이는 이후 재판에서도 하나의 맹점이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새로운 실존이 첫 방아쇠를 당긴 이후부터,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첫 방아쇠 이전에 태양을 바라보며 고통을 겪는데, 이는 자신의 그동안의 따분한 삶에서 기인한 존재의 불안에 관한 것이다. 그는 그동안의 따분한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일상에 짓눌려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살하고자 결심하고 해변을 나간 순간, 즉 죽음을 개별화하여 인식한 순간 그는 달라졌다. 그의 불안이 야기한 방아쇠라는 하나의 결단성이 태양이라는 ‘저기에(Da)’에서 새로운 존재-방아쇠를 당길 수 있으며, 기투할 수 있는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다. , 그는 방아쇠를 당기면서 타인의 실제적 죽음과 자신의 실존적 죽음을 실현한 것이며, 결국 그가 여러 번 방아쇠를 당긴 것은 이전과 다른 존재인, 현존재가 당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감옥에 갇히게 된 뫼르소는 아직도 자신이 왜 방아쇠를 당겼는지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동안 누려왔던 자유가 제약된 상황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그동안 내던져져 살아왔지만 자신의 뜻-기투-대로 살아왔던 인생과 현재 감옥에 내던져져 제약된 상황-피투-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된다. 바로 스스로 사고하고, 인지하여 이를 바탕으로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인 자신이 진정으로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시선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는 밖에의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지며, 자신의 회개를 위해서 온 사제마저도 신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진정한 실존을 겪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런 면에서 뫼르소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뫼르소의 실존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의 실존은 너무나 수동적인 형태였다는 점이다. 물론, 그 스스로 의지에 의해서 새로운 실존을 세계 내로 부름했다는 점은 인상 깊지만, 이는 스스로 원해서 불러낸 것이 아니며 여러 수동적인 계기들-어머니의 죽음, 타인의 죽음, 자신의 죽음-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그러나 조커의 아서 플렉의 경우는 색다르다.


아서는 코미디언이 꿈인 광대로, 홀어머니를 혼자 모시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가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겪고 있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심리상담사와 상담을 받아왔다. 그는 광대라는 직업과 웃음을 참지 못하는 발작 때문에, 그동안 많은 무시와 핍박을 받아왔다. 한 예로 그는 한 가게를 홍보하기 위해 입간판을 들고 춤을 추는 광대 알바를 했는데, 불량배들이 그것을 빼앗아 달아나다 그를 마주하자 집단 린치를 가하는 등의 행위를 당해왔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본 동료는 다음부터 그런 경우에 총을 사용하라며 건넨다. 이후 아서는 그 총을 항상 간직한다. 그리고 그 총으로 인해서 하나의 가능성이 새로이 열렸는데, 바로 자살의 가능성이다. 그런 그는 일기장에 아래의 문장을 간직해왔다. 이는 어느 정도 아서가 자살을 희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는 자신의 자살을 항상 상상하는데, 이를 절대 실현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오로지 품고 있는 코미디언을 위한 삶과 혼자 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총을 결국 사용하게 되는데, 대상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웃음 발작을 조롱하던 사람들을 향한 분노였다. 그런데 그가 일으킨 살인사건은 하나의 광대가 일으킨 짓으로 치부되고, 이는 저소득층의 분노의 표현으로 영웅시 된다. 그렇게 그는 조커라는 하나의 다른 존재를 깨닫게 되며, 이렇게 읊조린다.


For my whole life, I didnt know if I even really existed.

But I do, and people are starting to notice:

내 일생 동안, 난 내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어.

그러나 이젠 알아, 그리고 사람들도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어.


그렇게 운 좋게도 살인사건의 용의선상에도 오르지 않은 그는, 계속 꿈을 포기하지 않고 스탠딩 코미디 공연을 하게 됐는데, 공연은 실패적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의 공연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TV프로그램에서 웃음거리가 됐다. 이런 TV프로그램을 보면서 그의 꿈과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이 살인사건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자 혼절한 홀어머니를 보며, 삶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망상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을 학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병상 옆에 앉아, 그동안 엄마라는 존재에게 자신은 모든 것을 바쳐왔지만, 그녀가 내게 준 것은 폭력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고뇌를 한다. 그런 와중 어머니가 잠깐 정신을 되찾고 아서의 애칭인 “Happy.”를 부르자, 그는 결심을 하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Happy? Hmm, I havent been happy one day out of my entire fucking life:

행복? 내 빌어먹을 인생에 있어서 난 지금까지 행복했던 적이 한번 없었는데 말이야.,

I used to think that my life was a tragedy, but now I realize, thats a fucking

comedy:

난 내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해 왔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개 같은 코미디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조커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렇게 조커의 삶을 선택한 그는, 그동안 아서였던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장 나가고 싶었던 TV 쇼의 진행자인 머레이를 죽이고, 그는 결국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조커에 열광하는 폭도들에 의해서 아서이자 조커인 그는 풀려나게 되고,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폭도들의 열성적인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이면서 마지막 씬이 끝난다.


물론 조커라는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본적인 메시지는 사회 격차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보고자 2시간의 줄거리를 요약해보았다.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아서는 이방인의 뫼르소와 다르게 상당히 능동적인 모습으로 실존을 찾고자 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크게 세 가지 장면에서 아서의 불안과 결단을 느낄 수 있다. 첫 번째로, 그의 동료가 총을 건내 주었을 때, 자신의 불행한 삶을 끝낼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음에도 그는 실행하지 않은 장면이 있다. 만약 그가 자살을 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으며, 그리고 그럴 능력도 있었던 그는, 자신의 꿈과 어머니라는 지켜야 할 두 가지를 떠올리며 실행하지 않는다. , 이 과정은 그가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기존의 실존이 전부 부서지는 두 번째 장면이 나오게 된다. 코미디언이 되고자 하는 꿈과 믿었던 어머니의 사랑은 거짓이었다는, 두 가지 악재가 그를 덮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다시 총을 꺼내 들지만, 그 총은 자신을 향하지 않고 남들을 향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판단하여 깨달은 것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코미디언, 효자의 삶이 아니라, 나를 망친 사람들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라는 순수한 목적성을 지닌 존재에의 다가간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에는 당연하게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아서 개인의 삶의 시선으로 다가가면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는 결단을 하게 되고, 이 결단의 결과로써 새로운 존재를 자신 앞으로 불러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계 내로 불려온 존재는 단지 아서 개인을 위한 존재였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의 표출만을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그는 또 한번 존재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의 존재의 분노의 표출이 종료된 후,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호송된다. 여기서 아서는 경찰차 창문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공허와 희열을 함께 느낀다. 창문 밖에는 자신이 일으킨 살인에서 용기를 얻은 사회의 최하층들의 폭도가 일어나는 모습이 있었으며, 이를 보며 아서는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어느새 그의 웃음 발작은 사라졌다. 바로 진정한 자신, 조커라는 실존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장면의 마지막은 조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조커가 웃으며 춤을 추는 장면이다. , 아서가 그동안 꿈꿔왔던 코미디언의 삶이 조커로서 이뤄냈으며, 그리고 새로운 조커라는 약자에게는 영웅이며, 강자에게는 악당인 다크히어로의 탄생을 알리며 영화가 끝이 난다.


viewimage.php?id=3fb8d122ecdc3f&no=24b0d769e1d32ca73deb86fa11d02831d16706cea37200d6da918d798477dc62c92018347d828e351339dd2827e5750ed81a75830995f0b3e58692f5832555ac835f


이러한 주요 장면들을 살피면서 아서의 삶은 정말로 뫼르소의 삶과 상반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뫼르소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었다면, 아서의 삶은 그가 겪고 있는 웃음 발작 질환처럼 감정이 풍부하고, 자신의 꿈이 있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아서는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으며, 결단을 통해 새로운 실존을 자신 앞으로 불러일으켰다. 이 결단과 불러일으킴의 방법 또한 뫼르소는 상당히 수동적이었다면, 아서의 경우에는 그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했다는 점에서 능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멀리서 지켜봤을 때, 수동적 실존과 능동적 실존의 차이는 보이지만,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먼저 실존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떤 효용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뫼르소와 같은 꿈이 없고, 흐르는 대로의 삶과 아서와 같이 꿈이 있으며,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적극적인 삶. 이 둘 중 어느 삶이 옳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둘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하지만 두가지의 삶 모두는 어느 때, 벽에 부딪힐 수 있다. 인생이란 원하는 대로 흐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그 벽을 잘 넘어갈 수 있느냐, 아니면 부딪히고 아파하며 가만히 울고만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분명히 부딪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미래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부딪히고 난 이후의 문제이다. 부딪힌 이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고, 내가 무엇인지 인지하는 일이다. 이 일을 달성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실존이다.


그런데 이 실존은 실제적으로는 죽음을 인식해야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의 누구를 죽일 수도 없으며, 내가 죽는다면 실존이라는 의미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의 현재 실존을 인식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실존을 죽이는 일도, 새로운 하나의 죽음을 인식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때 하이데거식으로 말했을 때, 결단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현재 나를 인식하고, 이 상황 속에서 맞는 새로운 존재를 불러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는, 능동적인 실존의 형태이다. 수동적인 실존의 형태는 자신의 존재가 새롭게 들어오는 것 또는 새로운 상황이 내게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능동적인 실존은 다르다. 능동적인 실존의 형태는 우선 나 자신을 인식하고, 매번 상황에 맞는 자신의 존재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능동적인 실존의 형태는 하이데거의 실존과는 조금은 다른 개념을 지닌다. 하이데거는 세계--존재가 죽으면서 새로운 존재가 들어온다고 했지만, 능동적 실존의 경우에는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그 순서이며, 이후 자신의 존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 능동적 실존이란 비유적으로 하나의 페르소나라고 볼 수 있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 밑에는 자신의 얼굴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현재 많은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일에 익숙하면서도, 자신의 본 얼굴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그 가면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이상한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불안이 새로운 존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자신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 존재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한정 반복되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이자 본질을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이 자살을 우리가 해결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신을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우리가 실존을 찾기 힘든 이유에 대해서, 우리의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는 공동체 밑에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의 실존을 찾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실존을 찾기 위해서는 죽음의 개별화를 통한 불안의 현실화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안을 향한 직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적 불안이 다가올 때, 공동체에 숨으려고 노력한다. 공동체와 이야기하며 그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안과 마주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불안이 이끌어오는 심연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존재인 실존이 밝게 다가올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본질을 찾았다면, 마지막으로 인지해야 할 것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이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공동체라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이상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우리는 항상 맥락이라는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면밀히 인식해야 할 점은, 이 변화가 상당히 우리 존재에게 좋은 것이며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인식 없이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되면, 끝을 인지하는 인간의 특성상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변화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고, 이 두려움은 변화에 대한 저항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 속에서 변화를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건강한 변화를 겪을 수 있으며 이는 존재의 성장에 거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지금까지 존재에 대해서 살펴봤으며, 어떠한 실존이 우리에게 더욱 나은 방향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봤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의 만연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기회는 언젠가 찾아올 불안을 인식하고 홀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식 이후의 변화가 따른다면, 그 변화라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존재이자 실존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조커에서,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이 커튼 뒤편에서 춤을 추듯이, 우리의 본질 또한 현존재라는 가면 밑에서 춤을 출 수 있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의의이자 의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