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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릿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질문과 고찰은 아마 인류사가 막을 내릴 때까지 끝나지 않을 예정이다. 어쩌면 죽은 셰익스피어가 부활해 그가 우리에게 햄릿에 대한 창작자의 복안과 의도를 말끔하게 설명해 주는 날이 오더라도, 이미 햄릿』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화두에 오른 철학적 물음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햄릿』에 대한 논의는 이제 셰익스피어 그만의 것이 아니다. 햄릿은 창조주 셰익스피어의 것이면서, 동시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셰익스피어의 팬들과 여러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교양 수업 시간에 너무나도 많은 석학들이 햄릿의 성격에 대해 규정하고자 진땀을 쏟았다는 점을 마주했기 때문에, 햄릿에 대한 내 생각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빈약해보일까 두려워 그에 대한 생각을 말하기가 망설여진다.(이 부담감 때문에 도입부를 썼다 지우는 것을 반복했고, 그 덕에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독후감도 무려 햄릿에 대한 내 세 번째 접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일이든 한 발짝이라도 전진하지 않으면 무엇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내 부담감 이상으로 귀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애써 뒤로 하고 햄릿에 대한 나만의 고찰을 어렵사리 시도해보겠다.



 햄릿이 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은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매우 염세적으로 바라봤으며, 물질적인 삶의 무상함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작중 내내 호소하고 주어진 고난에 대해 괴로워한다. 햄릿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누구보다도 방황하고 있음을 그 유명한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삶을 붙잡고 있자니 목도한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우며, 죽음으로 나아가자니 그조차도 두렵다. 그가 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결심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햄릿은 어느 순간 끊임없는 고뇌를 멈추고, 그가 생각하는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신중했던 햄릿의 행적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극적이고 과감하다. 어쩌면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하찮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무모한 출정을 감행한 포틴브라스를 보고 감탄한 대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포틴브라스에게서 분명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죽음으로 나아가기를 결심한 햄릿은, 과거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자세로 복수를 쟁취해낸다. 그는 더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저버리고, 미지의 세계인 죽음을 선택했다.



 햄릿은 삶의 고통스러움과 무상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우유부단해보일 정도로 신중한 과거의 성품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나름의 매듭을 지었지만, 이 햄릿이 내린 결론이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정답에 가까운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간 햄릿이 옳은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 삶을 붙들고 있는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햄릿이 생전 죽음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죽기 전에는 죽음이라는 세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삶은 무엇인가죽음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고전적인 철학적 물음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회상이 아예 작품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포틴브라스처럼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인물이 덴마크를 지배하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 햄릿이 떠난 덴마크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다. 다만, 호레이쇼 등 덴마크에 남아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은 이미 죽음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햄릿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햄릿은 이미, 자신의 육신을 본인의 하마르티아인 우유부단함과 같이 내려놓고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햄릿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햄릿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그 셰익스피어마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