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종이책이다.


왼쪽 편을 볼 때엔 책 위를 잡고 빠르게 읽고,

오른쪽 편을 볼 땐 왼쪽 편을 접어 안정적인 그립감으로 읽어야 한다.

영원히 맞지 않는 그 좌우의 이질감을 감수하며 감기는 맛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책의 묘미이다.


한 가지 더,

다 읽은 책은 트로피처럼 왼쪽 책장에 정리를 해놓아야 한다.

오른쪽 책장은 아직 읽지 않은 책, 왼쪽 책장은 다 완독한 책들이다.

오른쪽 책장을 보면 이름만 알고 있는 명작 고전, 엄두 내기에도 부담스러운 철학 책들이 이빠이다.

하지만 왼쪽 책장은 일종의 훈장이어서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제목만 흝어도 책에서 느꼈던 감동, 즐거움, 공포, 희열이 잔상으로 남아 적금 통장을 보는 듯한 뿌듯함을 남긴다.




회사에서 종종 남는 시간에 책을 읽는다.

딸그랑 딸그랑

내가 일하는 시간 1분 1초가 돈이라면, 난 이 시간 동안에는 내 사적 취미인 책을 읽으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도둑질. 이것은 곧 불법, 불법은 도스프예프스키, 난 시벌스키

시벌스키가 된 난 일탈 속에서 사장의 돈을 약탈하는 방랑자이다.


하지만 사방에 CCTV가 있기 때문에 종이책은 읽을 수 없다.

근무하는 척, 심각한 표정으로 E북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난 사무실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알라딘 배송 전 미리 읽기' 이상의 독서를 하지 못했다.

책의 왼쪽 편, 오른쪽 편 감기는 맛이고 나발이고, 과연 E북을 결제하였을 때 훈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종이책으로 한번, 그리고 E북으로 한번.. 총 두 번을 사는 병신 짓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 이건 누가 봐도 병신이다. 종이책도 비싸고, E북도 비싼데 그 두 개를 동시에 사서 읽는다니.. 그것도 같은 책을 말이다.

이건 병신이나 하는 짓거리가 분명한 것이다.


그냥 E북만 사고 종이책은 사지 말아야 하나?

그렇다면 나의 훈장은?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기억은 종이책 속 미묘하게 남은 손때 혹은 지문 말고 증명할 것이 없다.

내 기억력은 그 책의 분위기만 기억할 뿐 결말도 가물가물한 경우가 허다하다.

내 기억력은 증인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의 완독의 훈장은 무엇이 증명 할 것인가?


난 점심 식사를 한 이후,

마의 산 (상권)의 '알라딘 배송 전 미리 읽기'를 마친 후 깊은 고민에 빠져 이곳에 글을 쓰는 상황에까지 다다랐다.

가방 속에 똑같은 마의 산 (상권)이 있음에도 마의 산 (상권)을 E북으로 구매를 해야하는 이 상황이 가혹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씨발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