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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한순간도 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대상이 지근거리에 있을 때, 이 혐오감을 제어하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속편한 행동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다만, 이 행동을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이 혐오스러움의 근원이 집처럼 소중한 공간에 위치해 있다면, 이를 해결하는 일이 아무리 곤혹스럽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대상을 마주보고 처리할 방도를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외면과 무시는 가장 간편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가장 적합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외면은, 외면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책임의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톨스토이는 타인의 죽음을 무신경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외면이라는 가장 간편한 해결책을 채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나 직계가족의 죽음이 아닌 이상, 타인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작중 이반 일리치와 막역하게 지낸 동료들은 그의 죽음에 슬퍼하기는커녕 죽은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품위를 내비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이반 일리치는 분명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삶을 살았으나 품위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는데 급급해 타인을 진솔하게 마주보고자 하는 노력은 미흡했고, 그 결과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리치와 사무적인 관계 이상의 친분을 쌓지 못했다. 그 결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하인 게라심과 그의 아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내가 독후감의 도입부에 든 예시처럼, 죽음은 응시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대상이다. 이반 일리치의 아내나 이반 일리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뾰도르 이바노비치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가슴 깊이 공감하지 못한 이유는 이반 일리치나, 이들이 악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이들과 이반 일리치가 주고받았던 정이 사무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고, 죽음이 너무나도 끔찍한 관념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이쯤에서 죽음에 대한 내 경험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다루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내 사적인 이야기를 공연히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왜 수업시간에 배운 결론과 판이하게 죽음을 끔찍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를 내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짧은 분량에 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내 경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분명 슬펐지만 그 슬픔의 정도를 논하자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내비친 슬픔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할아버지가 생전 당신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지 않으셨던 과묵한 분이기 때문인지, 내가 할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 때문일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슬픈 감정을 잘 억누를 수 있었다. 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슬펐을 때는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화장 과정을 묵묵히 지켜봤을 때였다. 할아버지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너무나도 자그마한 단지에 담기실 때, 그 단지는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그 한 뼘을 겨우 넘을 것 같은 작은 단지에 내가 알던 할아버지가 담겼다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었고, 무서울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라는 인상은 그 때 나에게 박혔다. 그리고 너무나도 미련하게도, 할아버지와 진작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다는 후회도 그제야 슬픔과 함께 물밀듯 들어왔다. 『이반 일리치와 죽음』의 등장인물로 설명하자면, 난 할아버지께 게라심도 되어드리지 못했고, 심지어 이반 일리치의 아들도 되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주변인들을 통해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의 중요성을 내비쳤으며, 작품의 막바지에서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는 이반 일리치를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보다 의연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톨스토이가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진실성 있는 관계를 맺을 것을 주장한 바에는 십분 동조하지만, 적어도 죽음을 의연하게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난 분명 할아버지께 막역하고 친밀한 손자가 되어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게라심이나 이반 일리치의 최후처럼 죽음 그 자체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 거짓된 관계에서 비롯된, 죽음이라는 끔찍한 것에 대한 외면은 물론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끔찍하지 않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죽음은 너무나도 파괴적이고,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