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 요약

1) 박경리의 <일본산고>는 일본 우익의 한국 비난/비판을 반박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2) 박경리는 부도덕적인 소재를 썼다는 이유로 일본 문인들을 비난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을 아름다움으로 미화하는 자기연민'이다.

3) '박경리가 일문학만큼 못 쓰는 데서 오는 열등감의 표출’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전후 일문학사가 '사소설 비판'에서 시작했다는 최인훈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박경리는 그들보다 더 멀리 나아간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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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박경리는 일본 우익의 한국 비판/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본격적인 일본론 집필에 들어갔고,

대표적으로 다나카 아키라의 ‘한국인의 통속민족주의’와 그에 대한 박경리의 반박이 같이 실려 있음.

이를테면 “한국인은 남의 눈치만 보는 데 급급하다.”, “애국가 첫 마디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아 기개가 부족한 한국을 상징한다.” 등의 한국 비판을 반박하고, 더 나아가 역으로 일본의 민족성을 분석하는 데 있음.

이처럼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필요가 있는데, 인터넷에 나도는 짧은 인터뷰만 가져오니까 마치 박경리가 혼자 열폭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움.

다시 말해, 일본 우익과 박경리가 키배를 뜬 상황인데, 그걸 박경리 혼자 화내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임.

물론 <일본산고>에도 한계는 있음. 박경리의 일본론은 어디까지나 한국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유효할 뿐, 객관적인 일본 연구서라 보기엔 어렵다는 점임. 그 점에 있어서는 박경리가 한국의 시선에서 일본을 바라보고 있다는 한계가 드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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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박경리의 일문학 비판은 부도덕적인 소재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님. 박경리의 문학은 살인, 강간, 자살, 근친, 불륜 등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소재를 도스토옙스키적인 광기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

“나의 배덕은 당신의 정절보다 위대하다”는 <표류도>의 한 구절만 봐도, 박경리가 윤리에 얽매여 일문학을 비판했다고 볼 수는 없음.

아마 나무위키에 실린 “일본문학엔 선함과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하다”는 인용문 때문에 그렇게 본 것 같은데, 이건 좀 더 전후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함.

중요한 건 ‘나약함’,

그리고 그 나약함을 아름다움으로 미화하는 자기연민임.

예를 들어, 다자이 오사무는 한 단편에서 “주먹밥 한 개를 두고 싸우는 날이 온다면, 난 그냥 죽어버릴거다.”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주먹밥 전쟁에서 뒹굴고 있는 박경리 입장에선 그런 다자이의 예민한 갬성이 가소로운 거지.

원래 박경리도 초기에는 사소설적 경향이 짙은 글을 많이 썼는데, <표류도>를 기점으로 작품 스타일이 변화하기 시작함.

재혼 실패와 아들의 죽음, 그리고 어떻게든 세 모녀의 생계를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인해, 더 이상 징징거릴 수는 없다고 깨달은 거임.

그때부터 박경리는 ‘나’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확대를 시도하며, 전보다 선이 굵고 탄탄한 스토리를 써내리기 시작했음.

그런 의미에서 박경리의 사소설적 경향 비판을 ‘그만큼 못 쓴다는 질투’로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음. 애초에 일문학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썼으니까.

최인훈 피셜 전후 일본 문학사는 '사소설 비판'에서 시작되었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선 박경리가 더 철저하게 극복하고 더 멀리 나아간 작가라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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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경리는 미시마의 할복을 ‘파멸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는데,

박경리는 죽음과 파멸보다는 삶과 창조에 더 큰 의미를 두었기에 그런 비판을 했던 것임.

일례로,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는 90년대 운동권의 연쇄 분신자살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며 비판했는데,

박경리의 미시마 할복 비판 역시 같은 맥락임 ㅇㅇ 무의미한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착각하지 말라 이거지.

그러니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이라기보단, “중2병에서 졸업 좀 해라!” 뭐 이런 맥락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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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념글 관련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토지에 대한 해외의 반응은 꽤 좋은 편임.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는 박경리 동상 제막식과 박경리 문학 강의 개설이 있기도 했음.

다만 로쟈가 지적한대로, 분량이 너무 길어서 5부를 전체 번역하지는 않고, 1부나 3부까지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좀 아쉬운 실정임.

인지도로 따지자면 일본 문인들에 비해 떨어지긴 하겠으나, 그 논리대로라면 <82년생 김지영>은 <죽음의 한 연구>보다도 더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 아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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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경리가 독갤에서 신성시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충분히 비판 받을 지점도 있다고 생각함. 근데 적어도 깔거면 어느 정도 박경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봄.

그런 의미에서 박경리의 문학 한 권과 <일본산고> 정도는 읽어보고 떡밥에 참여하는 게 어떨까?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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