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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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 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 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엔 피가 가득하다.








2. 채식주의자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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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를 신고 그녀는 내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힘있지도, 가냘프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3. 단순한 열정 - 아니 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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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카날 플뤼스에서 방영한 것이었다. 내 텔레비전에는 디코더가 달려 있지 않아 화면은 흔들리고 대사는 지글거리고 찰랑대는 이상한 소음으로 들려서 마치 끊이지 않고 부드럽게 계속되는 미지의 언어 같았다. 스타킹을 신고 코르셋을 한 어떤 여자의 실루엣과 한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용은 잘 이해되지 않았고,동작과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화면 가득히 여자의 성기가 나타났다.








4. 굿 올드 네온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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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을 기만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다. 과장하는 거 아니다. 내가 이때껏 한 일이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우러러보도록 나에 대한 특정한 인상을 심어주려 한 게 다였다. 뭐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작업이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결국 목표는 남들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우러러보고 인정하고 칭송하고, 뭐 그런 거. 당신도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거다. 학교에서 나는 우등생이었지만, 사실 본심은 무언가를 배우겠다거나 자기 계발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우등생이 되어야겠다는, 우수한 성적을 받고 학교 스포츠팀에 들어가고 좋은 성적을 내야겠다는 것이었다.








5. 개의 심장 - 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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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우-우-구-구-구우! 아, 나를 봐. 내가 죽어가고 있어. 개구멍 사이로 눈보라가 윙윙 몰아치면서 내게 마지막 임종기도를 해주고 있고, 그 눈보라와 함께 난 울부짖고 있어. 나는 끝장이야, 끝장이란 말이야. 더러운 원추형 모자를 쓴 몹쓸 인간, 인민경제중앙위원회 근무자들을 위한 표준식사보급소의 주방장 녀석이 끓는 물을 끼얹어서 내 왼쪽 옆구리에 화상을 입혔어.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비열한 놈! 오, 하느님 맙소사. 너무 아파! 끓는 물이 뼛속까지 뚫고 들어왔어. 지금 난 울부짖고 또 울부짖지만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6. 검은 꽃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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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풀들로 흐느적거리는 늪에 고개를 처박은 이정의 눈앞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한 제물포의 풍경이었다. 사라진 것은 없었다. 피리 부는 내시와 도망중인 신부, 옥니박이 박수무당, 몰락한 황족 소녀와 굶주린 제대 군인, 혁명가의 이발사까지, 모든 이들이 환한 얼굴로 제물포 언덕의 일본식 건물 앞에 모여 이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이토록 선명할까. 이정은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폐 속으로 더러운 물과 플랑크톤이 밀려들어왔다. 군홧발이 목덜미를 눌러 그의 머리를 늪 바닥 깊숙이 처박았다.








7. 코인로커 베이비스 - 무라카미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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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갓난아기의 배를 누르고 그 아래 있는 성기를 입에 물었다. 여자가 피우는 미제 멘솔 담배보다 가느다란 아기의 성기에서 생선 비린내가 났다. 아기가 울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들여다보았지만, 아기는 손발을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기의 얼굴에 붙여놓았던 비닐을 떼어낸 다음, 수건 두 장을 겹쳐서 깔아놓은 상자 안에 아기를 눕히고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상자 테두리를 테이프로 붙여 단단히 고정시키고 나서 그 위에 끈을 둘러 묶었다. 상자 위쪽과 옆쪽에는 엉터리 주소와 이름을 적었다.








8. 포트노이의 불평 - 필립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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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 의식에 워낙 깊이 박혀 있어 학교에 들어간 첫해에 나는 교사들이 모두 변장한 어머니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나는 마지막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냅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내내 어머니가 변신을 완료하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어김없이 주방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우유와 쿠키를 내놓았죠. 그런데도 망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이런 놀라운 변신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힘에 대한 존경심만 강렬해졌습니다. 그후로도 난 어머니가 변신중인 현장을 잡으려는 노력을 절대 멈추지 않았지만, 내심 그 현장을 목격하지 못하는 것에 안도하곤 했죠.








9. 솔로몬의 노래 - 토니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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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캐롤라이나 상호생명보험사 직원은 세시에 머시를 떠나 슈피리어호 반대편으로 날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사건 발발 이틀 전 그는 자신의 아담한 노란색 집 문에다 쪽지를 압정으로 박아놓았다.


1931년 2월 18일 수요일 오후 세시에 저는 머시에서 이륙해 제 두 날개로 저멀리 훨훨 날아갈 것입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주세요. 여러분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서명) 로버트 스미스,

보험회사 직원








10. 바다 - 존 밴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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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조수가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내내 우윳빛 하늘 아래 만의 물이 계속 부풀어올라, 마침내 들어본 적이 없는 높이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비 외에는 적셔본 적이 없는 바싹 마른 모래 위로 작은 파도들이 기어올라 모래언덕 기슭에서 찰싹거렸다. 우리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오래전 옛날에 만의 맞은편 끝에 올라가버린 녹슨 화물선은 다시 물에 뜰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날 이후로는. 새들은 가냘프게 울면서 급강하했다. 거대한 사발에 담긴 듯한 물이 수포처럼 부풀며, 납빛을 띤 푸르스름한 악의를 번쩍이는 광경에도 기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그날 그 새들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하얗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