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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은 저 너머에

광기는 바로 이곳에

압도되는 지식,

흔들리는 이성

한줄요약
찬연한 공포, 만연한 기이, 우주적 공포가 강림하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2권 리뷰다. 사실 그 이전에 엄청 간만에 독갤에 리뷰 올리는데 상당히 게을러터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 자체를 많이 안 읽었음……ㄹㅇ 상황 나아지면 연말에 다시 빡세게 독서할 예정임. 아무튼 황금가지판 럽크 2권은 고딩 때 사두고 묵혀뒀다가 이제와서 읽는데, 확실히 2권에 액기스라 할 만한 건 다 모아놨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2권부터 읽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에서 이미 럽크의 필력과 특징을 알아둔 뒤라 다행이었지, 만약 아무것도 모른 채 2권부터 읽었다면 내 안에 러브크래프트 인식은 소재만 좋은 고대건축박이쯤으로 기억됐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기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솔직히 그렇게 신경 쓸 만한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그것보단 이상하게 꼬여있는 만연체 문장과 코즈믹 호러라는 장르 속에서 대화 하나 없는 설명의 연속을 견뎌야 하는 게 더 문제다.

저 너머에서, 금단의 저택, 냉기, 우주에서 온 색채,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 광기의 산맥, 시간의 그림자 순으로 있는데, 개인적으로 저 너머에서, 우주에서 온 색채, 광기의 산맥 정도는 읽어도 좋고, 냉기는 짧아서 좋다. 2권에 실린 단편 전부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럽크의 필력을 고려해보면 이는 굉장히 혜자스럽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이게 코즈믹 호러인가? 하는 문제는 남을 수 있다. 사실 에셒 호러 내지는 그냥 좀 기괴한 에셒으로 봐도 무방한 단편도 있걸랑.


저 너머에서

빛의 파장은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으로 나뉘는데, 이 단편은 우리가 가시광선의 영역을 너머서 보게 될 경우를 묻고 있다. 당연히 러브크래프트가 썼으므로 희망차거나 장엄한 SF적 내용은 펼쳐지지 않는다. 나름 럽크의 충실한 원칙인 ‘설명할 건 나름 하는데 신뢰성을 흔들고 불안하게 하기’를 지키며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영역과 그곳에서부터 온 공포를 잘 표현했다.


금단의 저택

뱀파이어, 흡혈귀를 나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른 단편에 비하면 코즈믹 호러라 하기에도 뭣하고, 심지어 엔딩도 주인공이 살아있는 데다가 멀쩡하기까지 해(!) 러브크래프트스러우면서도 러브크래프트답지 않은 단편이다. 흡혈귀라고 해서 흔히 박쥐나 사람의 형태를 떠올리는 건 사치다. 직접 읽어보면 알지만 러브크래프트가 재구성한 뱀파이어는 상당히 인상적이고, 황산을 들이부어서 퇴치하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냉기

냉동인간을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러브크래프트 단편 중에선 ‘죽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2권에 있는 작품들 중에선 가장 짧아서 보기 편하다. 반전은 새로울 건 없지만 우주적 공포보다는 우리가 심적으로 다가오는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를 SF적 소재와 함께 짧고 굵게 다뤘다고 생각한다. 읽다보면 좀 추운 건 덤이다. 여름 최적화 단편이랄까?


우주에서 온 색채

러브크래프트가 가장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난 거기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1권에선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그렇게 좋아라하면서 칭찬했는데, 1, 2권 다 합쳐서 말하라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우주에서 온 색채를 꼽겠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대화 없는 설명이 이어지는 건 여전하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의 전반부가 러브크래프트가 꾸미는 점점 죄여오고 기괴해지는 과정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외계 존재에 대한 묘사가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들었다. 미지에 대한 것이라는 느낌이 충만하다 못해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가 와 닿았다. 오두막에 다같이 찾아간 부분이나, 탈출한 뒤에 묘사된 부분이나 인상적이다 못해 필력이 러브크래프트를 잠시 넘어섰다. 동시에 그 부분만큼 러브크래프트스러운 게 없었지만.

물론 오두막 탈출 부분에서 “왜 이렇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탈출하지?”라는 의문이 들었으면 낭패다. 러브크래프트의 신사 본능은 희박한 사회성과 맞물려 소설에서 종종 기묘하게 표현된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

사실 코즈믹 호러는 잘 모르겠고 외계인이랑 외계 신들 언급이 참 많았던 SF였다. 마지막 반전은 좀 호러이긴 했지만 스포일러를 몇 번 당한 터라(…) 애석하게도 충격받지 못했다. 러브크래프트 묘사 실력에 충격받을 만한 것도 잘 없다만.(오히려 잘 쓰면 그게 더 충격이다) 한 설화를 깊게 탐구하다가 오랫동안 몸을 숨겨온 외계인들과 숨막히는 눈치 게임을 벌이게 된 연구자를 화자가 펜팔해서 편지를 주고받다가 실제로 만나게 되는 게 주된 내용이다. 펜팔에서 눈치채다시피, 럽크가 본인 일상 분야를 살린 만큼 대화가 없어도 견딜 만하다.

개인적으로 외계인과 그에 대한 설정을 너무 설명한 게 감점 요소였다. 미지에 대한 공포보다는 사고방식의 차이를 좀 더 심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사실 21세기에 와서 그런 거 느끼기엔 쵸큼 무리가 있다고 반론하면 할 말이 없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광기의 산맥

러브크래프트의 최대 장편이고, 분량도 제일 많다. 개인적으로 읽는데 좀 많이 피곤했다. 재미야 있었고, 확실히 완성도도 있었지만…….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설명이 너무 많았거니와 건축물 묘사는 솔직히 많이 지루했다. 간헐적 재미만 기억에 남겼다면 평가가 달랐을 텐데. 초반의 남극 탐험은 그 당시 고증을 철저하게 따랐는지 몰라도 꽤 인상적이었다. 러브크래프트가 나름 조사를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공부를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건 전문성이 살아났다는 건 그것대로의 재미가 생겼단 뜻이다. 그렇게 재밌게 읽을 뻔했다. 설명이 구구절절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진행방식(두렵지만 말하겠다)을 감안하고도 긴박함이나 긴장감이 살아있는 편이다. 이 부분은 호평할 만한 게, 러브크래프트 읽으면서 긴장감은 정말이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광기의 산맥은 미스터리로 분류해볼 수도 있다. 남극에서 일어난 미지의 사건, 미지의 표본, 그리고 미지의 산맥의 비밀을 파헤쳐나가는 이야기니까. 그 끝도 나름 잘 맺었다.

건축물 묘사랑 긴긴 설명을 감내할 자신이 있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감내하기 싫으면 우주에서 온 색채라도 읽고.


시간의 그림자
솔직히 읽는 입장에선 전혀 호러가 아닌데 화자만 호러인 SF였다. 타임 패러독스 같은 마지막 반전도 익히 예상했지만 그래서 더욱 재밌었다. 물론……. 광기의 산맥이나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처럼 특유의 뭔가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것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설명하는 파트는 지루하다. 지루해서…… 많이 힘들다. 이것도 분량이 꽤 되는 편인데, 설명만 제하면 내용은 생각보다 별로 없는 편이다.

여기서 다뤄지는 외계인이 광기의 산맥에서 나온 외계인과 다른 구도로 대치된다는 점에서 재밌다. 연이어 배치시킨 이유가 이거인 것 같기도 하다. 연작 설정에서 나오는 재미를 빼면 자체적인 재미는 약간 식상해지는 정도다. 러브크래프트가 공포스럽게 쓰기보다는 조금 외계(고대) 생활 체험기 들려주는 느낌이라…….

결과적으로 다 나쁘지는 않지만 러브크래프트의 단점이 지워졌단 뜻은 아니다. 그나마 우주에서 온 색채가 러브크래프트의 단점을 특징화시킨 거고……. 나머지는 단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감내를 해야 한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매력이 좋다면 이런 단점은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대화가 좀 더 있었으면…… 그런 걸 러브크래프트에게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겠지.(고인인 점은 부차적인 문제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2권 등급표

필력: B+
독서 과정에서 느끼는 총체적인 평가, 곧 작품 자체에 대한 인상. 나머지 6개의 기준을 모두 합친 또 하나의 전체적인 기준.

가독성: C
문장을 읽을 때 글이 얼마나 잘 읽히고 술술 넘어가느냐를 기준으로 삼음. 본인 어휘력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으니 주의.

인물: B+
주인공을 비롯한 각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개성, 매력, 혹은 대사 센스, 유머까지, 곧 작중 인물을 얼마나 잘 살려내고 잘 써내고 잘 활용하느냐에 대한 기준.

설정: S
장르별로 기준의 정의가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공통적으로는 배경되는 시공간과 전후상황 등의 설정들이 가지는 매력과 활용도가 기준.

분위기: A
말 그대로 작품에 깔리는 분위기. 전체적인 분위기, 각 파트별 분위기, 분위기 전환 등의 '장면 인상' 위주의 기준.

구성: B
책 자체의 구성(목차), 문단 구성, 사건 구성, 사건의 흐름, 배치, 플롯으로 퉁칠 수 있는 부분까지. 소설의 골격에 대한 기준.

문장: C+
필력이 소설이라는 군집적이고 총체적인 문장의 인상이라면, 문장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부분을 가리키며, 흔히 부르는 묘사도 여기에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