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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시점을 돌리라 한다. 좋은 말이다. 밖으로 눈을 돌리라 한다. 좋은 말이다, 좋은 말이긴. 작가는 이런 소리를 하나도 들을 필요가 없다.

  엉터리 전회는 죽음이다. 성급히 촉진제를 쓰면 결과는 악주다. 작가가 영혼을 만나는, 그것을 찾아가는 갱도는 다 각기 있다. 저마다 있다.

  시대에 민감하고 연대성을 느끼라. 좋다. 앙가주망이다. 좋다. 단, 그대는 배우다. 그대의 앙가주망은 스테이지에서다. 내려와서 하고 싶을 땐 분장을 지우고 내려오라. 그러나 내려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23p)


- 최인훈의 근대 일문학 강의

일본의 전후 문학사는 사소설 비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82p)

현실이 아니라는 뜻은 사소설 속의 현실이 현실의 뚜렷한 여러 요소를 못 본 체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현실상이었다는 말이고, 환상도 아니었다는 것은 관념적 사치도 미학적 기호 탓으로 배척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사소설이 취급한 인간 존재는 내면에서나 외부에서나 지극히 가난한 욕망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제2차 대전 후의 새 문학은 사소설의 이 같은 내외 면에서의 벽을 넘어서려는 활력의 표현이었으며, 그 성과도 그런 기준에서 볼 수 있다. (84p)




- 이병주의 <마술사> 비평 中

  풍향에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호수처럼 이런 여러 가지 감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소설이 삼백 장이라는 스페이스를 선용하여 읽을 보람 있는 경험의 실체를 확보하고 있는 좋은 소설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311p)



- 박상륭의 <뙤약볕> 비평 中

  <뙤약볕>은 관념의 고압 회로이다. 원시 촌락의 실기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독자는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도록 사건, 문장이 상징적이다. (325p)

  이 소설 속에서 느닷없이 이웃 사람을 만날 위험은 전혀 없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면서 아무의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이렇게 풍속을 깡그리 빼버리면 소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작품은 그렇다 치고 이 이상 더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다. (326p)



-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펴내며

  저는 기껏해야 <율리시즈> 정도의 것을 소설에서 해봤고 거기서 더 나간 것은 해보지 못했는데요. <피네건즈 웨이크>에 해당하는 단계를 연극을 가지고 해결했다 할까 대체했다 할 수 있죠.

  <피네건즈 웨이크>가 그것 자체로서 충분히 문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문제에 대한 그야말로 문제의식을 영원한 질문으로서 나타냈다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나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 조이스가 뭔가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게 생각하는데요. (490p)



- 예술이란

  예술은 1) 인간이 2) 인간을 3) 부르는 소리이다. (217p)




여기까지 최인훈의 <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발췌한 최인훈 어록.

얕은 내용은 아니지만, 최인훈이 말을 원체 명쾌하게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술술 읽히고 재밌었다.

다음 번엔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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