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버전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습니다. 


 책의 서두에서 쿤데라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저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반복된다면 인생은 덧없기에 판단하고 심판할 수 없으며 가볍다면 용서되고 허용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던지는 본인의 마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스무살 애송이인 저는 연애를 해본적이 없습니다 ㅎ.. 제가 적극적이였다면 두명은 만날 수 있었을텐데 여자앞에서만은 굉장히 소심해지는지라 아직까지 경험이 전무합니다. 그런 저에게 이 책은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적도 없었고, 경험도 없으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굉장히 적었습니다. 하지만 테레자, 토마시, 프란츠, 사비나라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어떠한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으니 작가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봐도 무방할겁니다. 


 책은 연애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삶의 태도라는 관점과 정치 파트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연애란 삶의 일부고 연애하는 모습이 삶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정치는 현재 우리 사회가 시끌시끌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테레자는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헤메는 여자입니다. 토마시와의 만남도 운명적이였습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은 6가지의 우연이 겹친 사건입니다.) 따라서 안나 카레리나를 들고 토마시의 집을 찾아옵니다. 제 입장에서 테레자는 운명론을 신봉하면서 사실은 운명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운명이라는 계기가 주어진다면 테레자는 언제나 선택했습니다. 토마시가 바에서 술을 마실때도 얘기를 걸었고 토마시를 떠나는것도 선택합니다. 


 토마시는 여자를 25년동안 200명을 후릴정도로 절륜한 남자입니다. 외과의 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 한번 실패했고 그래서 사비나와 가벼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테레자의 등장으로 토마시는 단순히 섹스만이 아니라 같이 잠자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잦은 외도로 테레자와의 지속적인 반목이 생깁니다.


사비나는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입니다. 프란츠가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사비나와 살기위해 찾아올때 사비나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이 강요당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할것을 알고 홀연히 떠나버립니다. 토마시와의 섹스에서는 토마시가 명령하는 행위를 통해 관능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비나의 삶의 장소는 무대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테지만 접근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본인에게서 눈을 떼지는 못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관여하려고 하면 상대와의 인연을 끊습니다. 그래서 사비나는 명망당한 체코의 예술가로서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태도를 내보이라고 강요하는듯한 외국인들을 싫어합니다. 


 프란츠는 고지식한 지식인입니다. 사비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얻고 그 이후의 행동도 사비나에게 어떻게 보여질지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사비나와 헤어진 후에도.) 프란츠는 관계를 맺을때 언제나 눈을 감습니다. 완전한 암흑에서 그저 쾌락만을 감지합니다. 하지만 사비나는 그 모습을 보기 싫어 눈을 감습니다. 또한 사비나는 공동묘지에서 산책하는걸 좋아했는데, 프란츠는 그것을 질색했습니다.


 이게 제가 파악한 인물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굉장히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으니 책을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쿤데라는 6부에서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에대한 근본적 믿음인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와 대비되는 '똥'(신에게는 있을리가 없는 더러운 것)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또한 이러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아래 삶에 대한 미학적 이상을 '키치'라고 합니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작가는 대장정(진보, 이상의 실현)이라는 좌익의 정치적 활동은 '키치'아래에서만 진행된다고 서술합니다.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어린아이를 보며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거나 타인의 눈물에 공감하는 것.) 하지만 그렇기에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져버린다고 주장합니다. (작가가 전체주의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진보에서 가장 높게 세우는 기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의 '대장정'의 목적지는 평등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운동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부분은 폐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폐미니즘이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페미니즘의 운동방법은 혐오에 기반합니다. 남성들이 여성의 추한 외모를 가지고 혐오 했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권력을 지닌 남성들이 여성들을 차별해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한다. 등등.. 수많은 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똑같은 차별을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차별은 자신들이 약자이기에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약자의 혐오가 정당한가? 라는 문제는 글을 읽는분들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작중 사비나에게 사람들은 행위예술가인 그녀는 반드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비나는 그래야만 한다!(Es muß sein!) 라는 숙명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사비나는 사람들에게 넌더리를 내지요.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경우 여자라면, 반드시 페미니즘에 동의 해야만한다는 일종의 숙명론을 제시합니다. (혹은 자신들과 차별화 해서 부르더군요.) 사비나는 전체주의 키치왕국에 빠지지 않은 자유민입니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 여성들의 경우 자신들만의 '키치'를 가지고 있기에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숙명론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둘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저는 케케묵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꺼내고 싶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대 사람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에 예의를 갖춰, 성심을 다해 타인을 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에게는 없는 '똥'을 가진 우리들은 당연하게도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국 제살 깎아먹기 식의 미련한 짓이라는걸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희생해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남성의 성희롱, 성폭행 여성의 억울함, 혐오같은 모든 갈등의 요소들은 사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없어질 일들입니다. 또한 대상없는 사랑이 없듯, 우리의 차이는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시작은 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