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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은 좀 걸릴 듯.
- “노랑무늬영원”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상처’와 ‘회복’이다. 작중 인물들은 다양한 상황에 상처를 받는다. 단편 ‘회복하는 인간’과 ‘밝아지기 전에’는 지인의 죽음과 그 탓에 작중 화자가 겪는 괴로움을 그리는 한편, ‘훈자’와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은 가족 관계에서 받은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중 다수의 작품이 서술자의 회복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 ‘왼손’은 남성 서술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일한 단편이란 점에서 다른 수록작들과 차이를 가진다. 주인공 이성진은 은행 대부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원이다. 그는 반복되는 결혼과 직장 생활에 다소간 지친 상태다. 소설은 어느 날 그의 왼손이 말을 듣지 않으며 시작한다. 그의 왼손은 불현 듯 부장님 멱살을 잡거나, 우연히 마주친 첫 사랑 선혜의 손을 잡는다. 임의적으로 움직이는 왼손 때문에 성진의 일상은 점차 무너져간다.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끝내 왼팔을 잘라내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왼손도 쉽게 죽어주지 않는다. 오른손이 칼을 쥐었다, 왼손이 칼을 쥐었다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가슴에 칼을 꽂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 왼손은 이성진의 원초아(id)이다. 왼손은 이성진이 마음속으로 원했으나 하지 못한 행동을 대행한다. 하지만 “왼손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식의 독해는 맞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목숨까지 걸어가며 왼손을 잘라내려 했겠어. 이 지점에서 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이 소설은 자살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까? 다른 소설들처럼 회복과 치유를 암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체 뭘까.
-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의 몸은 어디까지 우리 자신의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는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적 성)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성의 범주야 말로 구성물이며,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정된 환영물이거나 ‘페티시’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인 범주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라고 입증된 범주이다.”(“젠더 트러블” 중)
우리가 결코 변치 않는다 믿는 것, 우리 자신의 것이라 믿는 성과 육체조차도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던 건 라캉이었지.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누구도 사회적인 해석을 거치지 않고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 “노랑무늬영원”은 위 인식을 공유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아를 구성한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에우로파’ 중)
타인의 욕망을 좇다보면 자연히 그 욕망이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 삼십 년 동안 잘못 살아왔다는 – 거짓으로 살아왔다는 – 느낌만이 강렬한 진실로 만져졌으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노랑무늬영원’ 중)
‘나’가 진정 원하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 내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사회가 시킨다는 생각. 인물들이 겪는 상처의 근간에는 바로 그런 가상의 고통이 자리한다. 인물들은 열심히 자신의 욕망을 찾아보지만, 애시당초 ‘진정한 욕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갈등 관계는 깊어간다. 이 시점에서 인물들은 고통의 원인을 세상에 돌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온 세상이 나를 그물로 잡아 새장에 가두고, 단 한 발짝만 걸어 나와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아쇠들이 사방에서 당겨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도.”(왼손 중)
위 문장에서 주인공 이성진은 ‘온 세상’이라는 허구적인 권력을 앞에 내세워 자신이 갑갑한 이유를 설명하려한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온 세상이 나를 그물로 잡아 가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권력이 개인을 억압함으로써 욕망을 부추긴다던 푸코의 말을 기억하자. 바깥으로 나오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기 위해선 당연 ‘새장에 가둔다’라는 전제가 선행해야한다. 이 시선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대립은 사회적 제약과 본성 사이의 대립이라기 보단, 사회적 제약과 사회가 추동하는 욕망 사이의 대립이라고 봐야한다.
- “노랑무늬영원”에서 다루는 다양한 폭력은 결국 사회적 제약과 제약이 부추기는 욕망 사이의 갈등으로 귀결된다. 인물들은 이 갈등에서 멀어지고자 하지만, 갈등 구조는 사회에 몸담은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다. 폭력이 없는 장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중략) 훈자 사람들은 자그마한 체구에 동서양의 인종이 보기 좋게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난한 스웨터를 입었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이를 드러낸 채 그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훈자’ 중)
훈자는 속세에서 가장 먼 공간이다. 자본 권력이 손닿지 못했고, 인종 사이의 차별도 존재치 않는다. 수록작 ‘훈자’에서 주인공은 훈자에 가고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진다. 그러나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훈자 역시 권력의 편입을 막지 못한다.
“작은 규모지만 깨끗한 호텔들이 들어섰고, 차츰 늘어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밤 치안이 예전 같지 않아, 혼자서 골목길을 산책하다 가진 것 모두를 털린 여행자도 있다고 했다.”(‘훈자’ 중)
어떻게 해도 고통을 피할 도리가 없다. 내가 한강 소설을 읽으며 왠지 폭력적이라 느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겠지.
- “노랑무늬영원”은 어떤 소설보다 비폭력을 원하지만, 그 이면엔 폭력을 피할 곳 따윈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만이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까.
물론,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나는 기대하고 있어요.
팔십 세의 나이에 그녀가 품은 기대 – 더구나 시간에 거는 기대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노랑무늬영원’ 중)
팔십 년 동안 고통을 느꼈으면서도 그 고통이 머잖아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건 얼마나 미련한가. 그러나 그 미련스런 행위에 한강 소설이 가지는 의의가 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 했다.” ('훈자' 중)
인물들은 이상 실현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계속 꿈꾼다. 이러한 노력은 인물에서 한강 작품 세계로 이어진다. 타인을 진정 이해해보겠다는 의지, 그 의지야말로 한강 소설을 빛내주는 원천이다.
한강 소설은 채식주의자밖에 안 읽어봤네. 뭔가 한강은 소설보다 시가 끌리는 감이 있는 듯. 여튼 폭력이 해결될 수 없다는 세계관이 오한기랑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네
오한기 분석하면서 말하겠지만 한강 소설은 너무 우울하고 감상적인 면이 있어서 소설로 읽기엔 버거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