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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에 대해 반박하며
수치심이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있음.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에서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고 인류가 문명화되면서 수치심이 생겼다고 함.
그는 미개한 비문명사회와 우월한 문명사회를 구별하고, 사회의 행동양식이 진화(진보라고 볼 수 있을 듯)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
저자는 엘리아스의 주장에 반박하며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문화권의 사례들을 가지고 그것이 틀렸다고 함.
- 처음에는 유럽, 근대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조산술, 산파, 산부인과 등의 사례를 언급함.
남성 산부인과 의사들이 여성을 진찰하는 것, 분만시 돕는 것, 여성의 성기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자체가 현대적인 것.
많은 경우 분만시에는 여성 산파들이 출산을 도왔고, 여성 산파들조차 출산시 여성의 음부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을 꺼려했음.
현대의 남성 의사들도 성을 객관화 하기 위해 노력했음.
중세에는 출산과 임신조차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이었음.
- 비서구 사회의 수치심.
비서구 사회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은밀한 영역으로 여겼음.
특히 많은 사례를 통해 비서구 사회의 여성 성기에 대한 수치심을 분석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음.
원시사회의 음부를 터부시하는 것이 수치심이 아닌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잘못되었다고 말함.
우리가 흔히 다큐멘터리로 접하는 나체 원주민 여성들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나체가 아님.
음부만을 정확히 가리는 치부가리개가 있으며, 음부를 가리기 위한 앉는 자세가 발달되어 있음.
다리를 벌려서는 안되며, 허벅지는 붙어있어야 하고, 여성은 나무를 올라가서는 안되고, 상대방 앞에서는 항상 허벅지 사이에 팔을 넣어두는 등.
종교 의식 때문에 여성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경우에 있어서도, 참여자들은 수치심을 느낌.
원주민 소녀들은 축제에서 춤을 추는 것을 꺼려하다가 춤이 끝나고 나면 멀리 도망가기도 함.
완전한 나체는 일시적인 축제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며, 그 때에도 남성들은 여성의 음부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임.
- 이 책은 대부분 여성 성기에 대한 수치심을 다루고, 남성에 대해서는 다른 책에서 다루겠다고 말함.
그래도 부록에서 남성을 다루긴 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그리스의 체육선수들의 나체 훈련임.
이 경우에도 수치심은 적용함.
여성들은 절대 남성이 훈련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30세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은 옷을 입어야 함.
체육선수들도 음부를 그냥 꺼내놓은 것이 아니라 첨단의 음핵두는 표피를 끌어올려 묶음으로서 가려야 했음.
또한 이 문화의 초기에는 본래 나체로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입었으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시기에 운동선수들은 연습할 때 옷을 입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음.
나체 훈련은 문명의 산물이고, 낡은 관습이 아니었음.
- 책 마지막 챕터 중에서
// 수치는 그래서 특히 '매력적인' 육체 부위를 공적인 시선에서 사적인 것으로 옮겨온다... 여자는 자신의 성기를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면서 성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내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통제한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그렇게 할까?...
첫째로, 여성들의 육체에 대한 수치, 즉 성적 매력의 제한은 남자들간의 성적 라이벌 관계를 제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이런 제한은 파트너 관계에 유리한데, 파트너 관계란 후세에게 더 나은 생존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여성에게는 후손의 사회화와 양육에서의 정신적 부담을 경감시켜주며 남자에게 그의 후손들이 다른 남자의 자손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해 더 큰 확신을 준다...(302-303p)
// 성을 감성적, 감정적 연관성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매번 인간 원래의 본성으로 선전되었다... 나체에 대한 수치심을 지양할 것을 추천하면서, 문화사와 민속학이 "수침감 및 성생활을 억제하는 그런 생각들은 단지 배워서 습득한 것임을" 증명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성교를 '요즘 춤출 때의 포옹 정도로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305p)
약간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성의 상품화는 '소비성향'으로서의 쾌락주의의 실현과 콘-벤디트 형제의 '분방한 쾌락'을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소비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방해벽, 예컨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나의 비밀스런 눈과 공개적인 눈을 분리시키는 장벽을 낮출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동성애의 '자유화'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쾌락이 왜 불법이며 남자들이 왜 서로 성적으로 '소비'해선 안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이를 싫어하게 하며("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위해 행위를 하지 않는다"), 가족과 결혼의 성실성, 처녀성, 나이 역시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상품화에 따른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은 성적 매력이 있고 성적 수행능력이 있는 젊은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다...(305-306p)
위의 인용문은 저자가 쾌락주의적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이 보편적이었던 것처럼 그 수치심을 거부하고 성의 자유를 추구했던 것이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 뿐임.
// 수치는 타고나는가?
아이들도 수치심을 보인다.
아이들이 혼욕을 하는 문화나, 나체해변 같은 곳에서, 아이들은 옷을 입고자 하며 나체로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다.
행동 반응의 보편성은 그것이 타고난 것임을 보여주는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312p)
나는 육체에 대한 수치가 '발생학적으로 확정된' 것인가라는 문제가 지금 결정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 의견으로는 아주 다양한 사회적 조건하에서 육체에 대한 수치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고 판단한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곤혹스러움의 기준과 수치의 벽이 일반적으로 훼손되었다는 것을 물론 그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훼손 과정이 오래 지속될는지도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3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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