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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문자의 발명을 역사(歷史)의 시작이라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역사는 2021년 전부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도이건 아니건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서력기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AD가 겉으로 드러난 역사라면, 사이에 끼인 BC는 망각의 역사다.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회계를 비롯한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말인즉슨 예수가 태어난 이래로 지금까지의 기간보다 역사가 시작되고 예수가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이 더 길다. 그것도 무려 천 년씩이나.


기간상으로 볼 때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비중에도 불구하고 고대사는 학자들에게나 대중들에게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 왔다. 현대 문명의 기틀을 세운 고대 그리스와 중국을 제외하면 우리가 고대—그리스인에게조차 고대로 여겨졌던 '고대의 고대'에 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초기의 역사는 현대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 옛적 이야기로만 치부되는 것이다.




카렌 라드너의 『바빌론의 역사』는 잊혀진 기원전의 역사, 고대의 고대로 우리를 초대한다. 여행지는 오늘날 나이트클럽, IT기업, 카페, 심지어 성매매 업소의 이름으로도 쓰이는 바빌론이다(한국인이라면 이 명단에 대부 업체를 추가할 수도 있겠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할리우드의 유망한 감독 데미안 샤젤의 차기작 제목도 바로 바빌론이다. 아마 성경에서 언급되는 타락과 성적 방종의 도시라는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처럼 기독교도에게는 퇴폐적인 악의 도시로, 다른 이들에게는 세계 7대 불가사의나 아무 가게에나 쓰이는 내용 없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빌론은 과연 어떤 도시였을까?


바빌론은 B.C. 18세기, 우리에게도 유명한 함무라비 왕—함무라비 법전에 대한 상세한 내용도 책에 있다—의 통치 이래로 근 2000년간 고대 근동의 문화와 학문을 선도하는 도시였다. 마르두크 신의 거처가 있는 상징적인 도시이기도 했다.(바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B.C. 12세기 이후로는 선대왕의 아들이나 동생에게 왕위가 자동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마르두크 신이 선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물론 신권과 왕권 간의 긴장을 야기하는 요인이기도 했으나,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과 같은 정복자들이 바빌론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도시로 꼽히는 우루크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 엘람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수사가 아닌 바빌론이 우리의 여행지로 선택된 까닭은 이러한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고대 근동사에서 '모든 길은 바빌론으로 통한다.'


지금도 바빌론엔 사람들이 산다. 하지만 수천 년 전에 수만 명이 살던 세계 도시의 영광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사담 후세인은 바빌론을 재건하려 했으나 그로부터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했을 뿐이며, 후세인을 척살한 미군에게 바빌론은 군사 기지로 사용할 부지에 불과했다. 저자는 이 황폐해진 고대 유적의 화려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바빌론의 흥망성쇠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시적으로 훑는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의 기쁨은 멀게만 느껴지는 옛사람들이 실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게다가 그것이 망각된 고대 근동의 역사라면 기쁨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바빌론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고대인들도 희노애락을 느끼는 인간임을, 우리 또한 언젠간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인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막의 모래로 뒤덮인 바빌론과 고대 근동의 역사는 그간 우리의 시야 밖에 머물며 다시 기억되기를 2000여 년간 기다려 왔다. 바빌론의 건축물은 내구도가 약한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까닭에 오늘날 남아있지 않으며, 사료 또한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는 없다. 2000년을 망라하는 『바빌론의 역사』의 원제가 『A Short History of Babylon』인 것은 이 때문이다.


중동은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 골칫덩이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중동은 자주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배경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빛나는 문명을 일궈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중동의 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마에게〉나 〈모술〉 같은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빌론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 점을 일깨워준다.


다만 세계 도시로서 바빌론의 화려한 면모와 실제 거주민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기 어렵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메트로폴리스』의 저자 벤 윌슨은 바빌론을 관능의 도시로 일컫는다. 한데 이 책에서는 바빌론의 관능성, 세계 도시로서의 유혹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추후 독자가 메꿔야 할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