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물의 굉장히 독특한 사상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눈여겨봤음. 다 읽고 나서 든 의문이 뭐냐면, 키릴로프는 항상 누구를 만나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잖음.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도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고, 자기 말마따나 '때가 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이론(자살)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졌음. 근데 막상 후반부에 표트르가 샤토프 죽인 후에 찾아와서 이제 때가 왔으니 실행하라고 하니까, 유서 쓴 후에도 빨리 안 죽고 계속 주저리주저리하면서 시간을 끌음. 방에 들어가서 옷장 옆에 숨어있다가 표트르 손가락 깨무는 건 코미디에 가깝고, 별 지랄을 다 하다가 마지못해 죽는단 말임.

아무리 생각해도 '막상 실행하려고 하니 죽는 게 무서워졌다' 정도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민음사판 번역자 김연경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더라고. '그런 류의 사상에 보내는 도스토옙스키의 조소다' 정도로 요약됨. 또 자살한 다음에 표트르가 본 그의 시체(머리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피와 뇌수가 흘러나오는)를 굳이 묘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되고. 키릴로프는 자살함으로써 '인신' 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는 거지. 작가의 성향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긴 한데, 이게 사실이면 키릴로프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팍 식어버리게 되잖음. 그 인물이 두고두고 회자될 가치도 사라져버리고.

독붕이들의 생각이 궁금함.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그렇게 의도하고 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