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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있게 죽음을 맞을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의 불안한 꿈은 시끄럽고 아무 쓸모 없는 말다툼, 욕설, 주먹과 발길질에 중단되었다.
이런 것들은 짜증스럽지만 불가피한 접촉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내지르는 반응들이었다. 그럴때 누군가 촛불을 켜면, 그 흐느끼듯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흐릿한 동요의 기미가, 한 덩어리의 인간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형체는 바닥에 엎드린 채 혼란스러워 하면서, 마디를 찾아볼 수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생기를 잃은 채
늘어지고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발작을 일으키듯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올랐다가는 다시 피로에 밀려 잠잠히 무너져 내렸다.
작업장에서 알게 된 소식들, 즉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는 것과 러시아의 공격, 히틀러의 암살 기도 실패에 대한 소식들은 거센 파도와 같은 희망을 불러왔지만 일시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빠져나가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정신이 흐릿해 지는 것을 우리 모두 느꼈다. 노르망디와 러시아는 너무나 먼 반면 겨울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진흙창인 우리의 세상과 이제는 그 끝을 상상하기도 힘든 황량하고 정체된 우리의 시간 외에 다른 세상과 시간이 존재할것 같지 않았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욱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 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카베의 삶이 아니다. 선발이라는 결정적 순간도, 설사와 이를 검사하는 기괴한 일화도, 질병조차도 카베의 삶이 아니다.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하여 고허하고 긴날, 허기나 노동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것이 어떤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꺠달았다. 그러므로 고대의 현인들은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남기는 대신,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런 큰 위험을 상기시키는 게 옳았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 내용은 바로 이런것이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당신들 집에서 겪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고통', '공포'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중략)침묵이 서서히 주변을 압도한다. 그때 나는 3층에 있는 내 침대에서 쿤 노인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상체를 거칠게 흔들며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그 소리를 듣는다. 쿤은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 쿤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옆침대의 그리스인, 스무살 먹은 베포가 내일 모레 가스실로 가게 되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베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작은 전등만 뜷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다음 선발때는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쿤은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
유대인 학살 관련 책으로 많이 언급되는 책인데, 왜 굳이 증언'문학'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음. 책 뒤에 붙어있는 작가 인터뷰도 생각이 많아지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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