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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의 표백은 완성된 세상에서 시시한 목표 밖에 남지 않게 된 표백 세대의 청년들이 허무주의적인 세상에 자살로써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니체의 철학은 힘에의 의지의 철학이다. 모든 생명체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생명체는 더 큰 힘을 욕망한다는 것이 니체의 사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사상적 측면에서 니체의 철학과도 잘 맞아보인다. 개인의 노력과 끝없는 개인 간 자유경쟁으로 성공을 쟁취하라. 니체가 바란 힘에의 의지의 장이 열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결과적인 측면에서 니체의 철학과 배치된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계층 이동이라는 목표에 대해 단념하게 되어, 더 큰 힘을 추구하는 것에 좌절하게 된다.
위와 같은 해석은 힘=돈이라는 맑스적인 도식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해석이긴 하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사회의 철학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철학이기에, 사회의 철학을 다룬 맑스의 개념을 갖고 와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 현실 사회속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우리 사회 속에서 산업화, 민주화 같은 거대한 사회적 아젠다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작은 사회적 아젠다들만이 남아있다. 이런 작은 사회적 아젠다는 술자리 얘깃거리가 될 뿐 개인이 사회변혁을 위해 참여할 목표가 되지 못한다. 남은 것은 자유경쟁이다. 그러나 그 자유경쟁 속에서도 결국 개인이 도달하는 곳은 공무원, 회사원이다. 평범을 위해서 사람들이 피흘리는 자유경쟁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 철학의 관점에서 좌절스러운 현실일 수 있다. 버잘것없는 힘을 위해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개인은 힘의 추구에 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결국 표백 소설 속의 표백 세대는 자살로써 사회에 오점을 남기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이는 명예, 또는 문화적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힘을 추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보잘것없이 살다가 죽느니 강렬하게 힘을 추구하고 죽겠다는 표백 세대의 저항이다.
니체의 철학은 개인적 불안정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불언정한 생성 세계에서 끊임없는 힘의 추구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존재이다. 반면에 맑스의 철학은 사회적 불안정의 철학이다. 사회의 모순점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혁명의 단계에 이르러 사회가 변화하게 된다.
표백 소설 속 표백 세대에게 사회는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고, 개인의 미래는 평범함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안정되어 있다. 이러한 안정됨 속 허무주의에 신음하는 청년들이 선택한 것이 자살이다. 이 세상에는 힘을 추구할 것이 없다. 목표가 너무나 평범한 것, 죽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킬 만큼 사회적 모순도 없는 안정된 시대이다. 오직 자살로만 사회에 파격을 주어 문화적 권력을 쟁취할 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모든 것이 계산되어버린 표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존재라는 것.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힘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니체의 철학은 힘에의 의지의 철학이다. 모든 생명체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생명체는 더 큰 힘을 욕망한다는 것이 니체의 사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사상적 측면에서 니체의 철학과도 잘 맞아보인다. 개인의 노력과 끝없는 개인 간 자유경쟁으로 성공을 쟁취하라. 니체가 바란 힘에의 의지의 장이 열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결과적인 측면에서 니체의 철학과 배치된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계층 이동이라는 목표에 대해 단념하게 되어, 더 큰 힘을 추구하는 것에 좌절하게 된다.
위와 같은 해석은 힘=돈이라는 맑스적인 도식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해석이긴 하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사회의 철학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철학이기에, 사회의 철학을 다룬 맑스의 개념을 갖고 와서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 현실 사회속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우리 사회 속에서 산업화, 민주화 같은 거대한 사회적 아젠다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작은 사회적 아젠다들만이 남아있다. 이런 작은 사회적 아젠다는 술자리 얘깃거리가 될 뿐 개인이 사회변혁을 위해 참여할 목표가 되지 못한다. 남은 것은 자유경쟁이다. 그러나 그 자유경쟁 속에서도 결국 개인이 도달하는 곳은 공무원, 회사원이다. 평범을 위해서 사람들이 피흘리는 자유경쟁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 철학의 관점에서 좌절스러운 현실일 수 있다. 버잘것없는 힘을 위해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개인은 힘의 추구에 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결국 표백 소설 속의 표백 세대는 자살로써 사회에 오점을 남기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길을 택했다. 어쩌면 이는 명예, 또는 문화적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힘을 추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보잘것없이 살다가 죽느니 강렬하게 힘을 추구하고 죽겠다는 표백 세대의 저항이다.
니체의 철학은 개인적 불안정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불언정한 생성 세계에서 끊임없는 힘의 추구를 통해 성장해 나가는 존재이다. 반면에 맑스의 철학은 사회적 불안정의 철학이다. 사회의 모순점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혁명의 단계에 이르러 사회가 변화하게 된다.
표백 소설 속 표백 세대에게 사회는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고, 개인의 미래는 평범함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안정되어 있다. 이러한 안정됨 속 허무주의에 신음하는 청년들이 선택한 것이 자살이다. 이 세상에는 힘을 추구할 것이 없다. 목표가 너무나 평범한 것, 죽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킬 만큼 사회적 모순도 없는 안정된 시대이다. 오직 자살로만 사회에 파격을 주어 문화적 권력을 쟁취할 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모든 것이 계산되어버린 표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존재라는 것. 어쩌면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힘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너무 좋은 글..얼마 전에 표백 읽고 기분이 울적했었네요ㅋㅋ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