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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불평한다. 여기, 앨릭잰더 포트노이라는 사내도 부풀어오른 불평을 마음과 팬티 속에 지닌 채 슈필포겔 의사를 찾아왔다. 환자는 갈색 상담용 카우치에 누워 의사에게 자신의 불평을 토로한다, 400페이지가 되도록, 쉬지 않고.
필립 로스는 유대계 미국 작가로, 그의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바탕을 둔다. 유대인들, 뉴저지 뉴어크 시, 유대교 성인식 등등 말이다. 개인적으로 필립 로스는 의식의 흐름에 있어 탁월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단, 의식의 흐름의 주체가 '화자'가 아닌 '작가'이다. 작가는 집필 과정에서 앞 문장을 염두에 두고 뒷 문장을 써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배경이 매우 유사하더라도, 문장이 유려하게 이어져 읽는 맛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소설의 첫 페이지에, 작가는 '포트노이증'이라는 병명을 사전식으로 설명해두었다. '포트노이증'에 관한 핵심 구절을 가져오면 포트노이증은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슈필포겔 박사의 첨언이 마지막 문장으로 적혀있다.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 건지 포트노이가 어머니와 관련된 경험을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학교에 들어간 첫 해에 포트노이는 모든 교사를 변장한 어머니라고 여겼다. 즉, 어머니의 유난과 감시, 억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유년 시절의 포트노이에게 큰 스트레스로 이미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시작으로, 포트노이는 점점 성장해가며 사춘기에 접어들고, 자연스레 자위와 성관계에 눈뜨게 된다.
하지만 포트노이의 가정 환경은 어떤가? 보수적인 유대계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포트노이를 끊임없이 아이 취급하고, 조금이라도 '정석', '모범', '규율'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면 집 안이 무너진 듯 눈물 흘린다(정말 운다). 그렇다면 포트노이의 성적 욕망은 가정 내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죄악시된다. 하지만 이런 취급이 포트노이의 성적 갈망을 잠재울 수 있을까? 전혀. 오히려 불태운다. 각성시킨다. '포트노이증'의 발단인 것이다.
이후 포트노이는 가족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리비도를 불태워 온갖 방식으로 은밀히, 동시에 대담히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한다. 예를 들자면, 공공장소에서 자위하기, 입구에 바셀린을 바른 병에 물건을 넣어 자위하기, 반으로 가른 후 씨앗 부분을 파낸 사과에 대고 자위하기, 버스 안에서 자위하기, 집단 자위, 돼지 간을 이용해 자위하기 등등. 그렇다면 이런 행위를 끝낸 후 포트노이는 후련한가? 개운한가? 아니, 저 멀리서 어머니의 '소곤거림'이 들려온다. 포트노이를 원망하고 부모의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한탄하고, 유대인으로서의 긍지를 깨뜨렸다고 토로하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실제로 포트노이의 행위를 목격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포트노이에게 말한 것도 아니다. 전부 포트노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어머니의 말씀'이자 '포트노이의 강박'이다.
즉, 포트노이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행위를 하면, 끊임없이 부모님의 말과 모습이 떠오르고, 그에 따라 성적 만족도는 하락하며 증오가 폭발한다. 그에 대한 반항으로 포트노이는 더욱 강렬한, 더욱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에 빠져든다. 그러면 더더욱 부모님의 유난스런 걱정, 당시 미국에서 소수이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그를 짓누른다. 이런 악순환이 포트노이를 호색한 병자로 만든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쩐지 화자와 작가인 필립 로스를 동일시하게 된다. 소설을 집필할 당시의 작가 나이와 작 중 포트노이의 나이가 유사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하나 아이를 낳아 대를 잇고 싶어하진 않는다(실제로 필립 로스는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했고 자식은 없다). 미국에 살아가는 유대인이다. 그렇다고 필립 로스가 소설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를 했다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포트노이가 가졌던 유대인으로서의 불평,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불평은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필립 로스의 소설에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가지는 불평이 꽤나 등장한다. 풍습이든, 외모든, 다른 민족이 가지는 시선이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작가로서의 실력을 의심받을 것이고, 같은 유대인들에게 꽤나 눈치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필립 로스는 자신의 이드를 소설 속에 풀어준다. '포트노이증'으로 대표되는 온갖 성적 행동들이 날뛰는 가운데 필립 로스는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시선.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시선, 그 외 다양한 측면(정치, 도덕)에 대한 시선을 삽입한다. 난잡스러운 표현들은 독자의 흥미를 이끌고 충격을 주며, 몰입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소설을 '뜨겁게' 만든다. 실제로도 출간 당시 호주에서는 금수 조치되었음에도 밀매가 성행했다고 하니, 예수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진면목을 폭로(?)하고 싶었던 필립 로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세계의 독자들이 앨릭젠더 포트노이라는 유대인 변호사의 이상 성욕을 목도했으니까.
이 책의 번역자인 정영목은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필립 로스를 설명한다. '로스가 그 자신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중략) 포트노이의 불평에는 그 차가움에 맞서는 것이 있으니, 바로 배를 잡고 구르게 만드는 유머다.'
그 '유머'가 소설에 등장하는 포트노이의 성적인 행위들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포르노 마냥 성적 묘사를 질펀하게 하지 않는다.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처럼 표현한다. 그러니까, 성관계 장면들이 전부 슬랩스틱 코미디 같다. 하지만 그 무대의 장막 뒤에는 필립 로스의 차가운 유대계 눈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지능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며 독자들을 만족시켜 준다. 독자들이 슬랩스틱 코미디에 방심한 동안 작가가 심어놓은 시선을 커튼 너머에서 무의식 중에 받아들인다. 작가로서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포트노이의 '불평'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포트노이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할 텐데도.
ps. 마지막 펀치 라인은 정말 좋았음.
딸쟁이 ㄷㄷ
집단자위는 머임 ㅋㅋㅋㅋㅋ
짤막하게 언급하면서 지나감ㅋㅋㅋㅋㅋ
개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