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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신화, 즉 ‘과학자’와 ‘종교주의자’ 사이의 장대한 논쟁을 묵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양 진영의 일부 구성원들이 오늘날까지 이런 신화를 지속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학사가도 이러한 ‘갈등’ 모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한다. 16세기와 17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주의자’의 박해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진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처럼 분리된 진영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장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민간에서 지어낸 이야기다(갈릴레이에 관한 3장의 언급을 참고하라). 오히려 자연을 연구하는사람들은 종교적인 인물이었으며, 많은 성직자들이 자연을 연구했다. 신학적 연구와 과학적 연구 사이의 연관성은 두 가지 책에 담긴 사상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두었다.


-Lawrence M. Principe 씀 노태복 역, 『과학혁명』 2장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조직되어 1540년에 교황의 승인을 받은 예수회는 주로 교육과 학문 연구에 몰두했으며, 특히 과학, 수학, 기술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예수회는 개신교도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이끌었을 뿐 아니라, 설립 초기에 수백 개의 학교와 대학을 세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예수회의 교육론은 혁신적인 방식의 교습 및 교과과정에 바탕을 두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방법론의 중요한 특징들을 계승하면서도 수학(1700년 무렵 유럽 전역의 수학 교수직 중 절반 이상을 예수회가 보유했다)과과학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예수회 학교들은 과학혁명의 새로운 과학사상을 종종 가장 먼저 가르쳤으며 이러한 과학사상을 다루는 사상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예수회는 새로 개척된 무역로를 따라 전 세계에 퍼져나가,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물론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이들 덕분에 최초로 전 지구적인 서신 연락망이 마련되었다. 이 연락망 덕분에 생물 표본과 천문 관측 자료에서부터 먼 이국의 지식과 풍습에 관한 폭넓은 정보 및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로마로 흘러들었다. 과학과 수학 연구에 대한 예수회의 태도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찾는다’라는 모토에서 잘 드러난다.

-1장




가령,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 신, 그리고 자연계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확신했으며, 이로써 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당시에 논의된 주제들은 과학과 신학/종교가 뒤섞인 복잡한 성격을 띠었다.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길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둘째, 근대 초기의 경우 기독교 교리는의견이나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다. 당시의 기독교 교리는 자연계의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에 맞먹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신학적 이론이나 예배 관행의 고차원적인 지점을 놓고서는 교파 간에 분명 이견이 존재했다. 마치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중력의 실재성이나 원자의 존재 또는 과학적 연구의 타당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 아주 미세한 지점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결코 ‘개인적 믿음’의 지위로 전락한 적은 결코 없었다. 오늘날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신학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들의 요체이자 존재에 관한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탐구 행위였다. 그렇다보니 신학적 교의들은 근대 초기 자연철학자들이 연구 자료로 쓴 데이터 집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학적 사상들은 과학 연구와 추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지 과학 연구의 바깥에서 얼마간의 ‘영향력’을 미친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 사상은 자연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세계의 필수적이고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2장




뉴턴 옹호자들은 중력은 단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서, 뉴턴 자신은 정말로 중력의 원인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방법을 본다면, 뉴턴은 17세기에 우연히 태어난 ‘근대과학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뉴턴은 평소답지 않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재발견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법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뉴턴은 프리스카 사피엔티아(prisca sapientia)를 믿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개념은 ‘고대의 지혜’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락했다고 여겼다. 뉴턴은 그리스신화, 성경 구절, 그리고 『헤르메티카』를 해석하여, 그 속에 자신의 중력 법칙을 포함한 세계의 숨겨진 구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뉴턴의 생각으로는, 중력이란 신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여해서 생긴 결과였다(그리고 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뉴턴은 믿었다). 신의 기하학적 청사진을 밝혀냈다고 여긴 케플러처럼 뉴턴도 자신을 (단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고대의 지식을 복구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세월이 흐르면서 타락했다고 믿었던 뉴턴은, 신학 및 역사 연구에 오랜 시간을 바쳐 ‘최초의’ 신학을 복구하려고 노력했다. 가령, 이 신학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배제되어 있었다. 또한 뉴턴은 고대의 연대기를 열심히 연구했다. 그렇게 한 데에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성경 속 예언을 해석하기 위해 믿을 만한 날짜를 알아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의 과학과는 다른, 자연철학의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관점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뉴턴이 보기에, ‘자연철학의 과제는 우주의 완벽한 체계에 관한 지식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이 지식에는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에 늘 관여하는 신에 관한 지식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3장




오늘날에는 인문주의자들이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이거나 심지어 반종교적이라는 오해가 퍼져 있다. 물론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그릇된 행위를 비난하고 스콜라신학을 업신여기긴 했지만, 결코 기독교나 종교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인문주의자들이 지지한 많은 교회 개혁은 언어의 개혁과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초창기 몇 세기 동안의 기독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인문주의자들 중 다수는 성직자이거나 교회 행정에 관여하거나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도 공식적으로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했다. 더군다나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교황들이 열렬한 인문주의자였다. 특히 니콜라스 5세, 식스투스 4세, 피우스 2세가 대표적이다. 추기경들도 마찬가지였고, 법률가들 중에도 인문주의자들이 많았다. 요즘 시대에 흔히 하는 오해는 이른바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혼동한 결과다. 이것은 20세기에 생긴 개념으로, 근대 초기의 인문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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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에 대한 잘못된 통념 많이 교정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