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도 없는데, 어디선지 말똥이라도 타는 듯한 냄새만 흐르고, …… 이런, 시각마다 소승은, 소리를 찾습지, 찾다 말입지, 대개의 밤으론입지, 물론 수도부와 방금 전에 헤어지고도 말입지, 한번의 긴 수음을 하고 말입지, 조금 울다 잠듭지, 그렇습지, 소리를 찾다 말입지, 울음으로 소리를 좀 만들어보다 잠듭지, 약간의 진정제, 약간의 외로움, 약간의 비애… 그런 날의 계속, 도는 멀고입지, 이 사막의 살인적인 무료 속에서 굼벵이가 거진 거진 돼가며 입지. 썩은 몸뚱이가 아니라 정신 속에서 꾸물거리며 말입지, 죽고 있습지. 살인이라도 하고 싶습지. 고함이라도 버럭 버럭 질러대고 싶습지. 그러다 잊어버렸습지, 그림자가 아직도 있는지 없는지, 그것까지도 잊고 말입지, 그냥 사는겁지, 글쎄 그것도 사는겁지."
밖은 글쎄, 요 몇 세월 동안이나 석양이고 있는데 촛불중은, 문이 훤하게 열려진 그 유치소 바닥에 핀 한 송이 석양 속 연꽃(夕陽蓮)이어서는, 자기의, 그중 푸르고도, 그 노란자위가 진했던 한철의 삶을, 두터운 침묵의 알껍질로 싸아 안고 있는, 그러니 그것이 그의 고향이 돼버린, 남녘으로 으스름한 데, 마른늪 하나를 상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마른늪을 연상하며 그는, 이 유치소를 참고 있는 듯했다. 바람도 없는데, 어디선지 말똥이라도 타고 있는 듯한 냄새만 흐르고…… 석양은 석양녘대로, 그리고 모든 시각마다, 권태와 정적 이 버스럭 모래가 돼 버스럭 무너져 내릴 뿐만 아니라……… 헌데, 저 두터운 침묵의 알껍질 속에 싸인, 어떤 의미(意志) 하나는, 아직도 저 무량겁 정적 한 사막의, 그 어느 한 자락 모래속에 품어져 있으며, 부화와 비상에의 꿈만 꾸고 있는 것인가?(잠들어 있는 불. 침묵 속에 가라앉은 말(언어(言語)). 헌데도 그 알속에 다 잠만 뉘여 놓고 날아나온 새 한 마리는 어느덧, 그것의 한칼파의 우주를 다 날아버렸던지, 자기도 모른 새, 자기가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로 되돌아와버렸음을 발견하고 놀라고 있는데, 아으 그러니 이제는 좀 쉬어도 좋을 때인 것이라고 그것은, 슬픈 안도감으로, 비상에의 꿈을 접지 않을 수가 없다고 처념하고 있는데, 그러자 그 순간, 그렇게도 힘찼던 그것의 두 날갯죽지들에서 힘의 깃털이 모두 떨어져 내렸는데, 동시에 그것은 못 견딜 중력감(重力感)을 느끼기 시작하는 중에, 그것은 무서운 추락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좇아 그것의 전신은, 참으로 참아내기에 벅찬 열예(悅豫)로 수물거리기 시작했는데, 별똥별이 대기권을 뚫고 들 때 그렇다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제 몸을 기름 삼아 타고 있었으며, 훨훨 타고 있었으며 타고 난 찌꺼기는 슬픈 재, 떨어지는 것들은 무저갱 속에서까지라도, 어쨌든 한번은 멈출 것이 아닌가, 멈춤이 없다면, 어쨌든 그 멈춤 없는 추락 자체가 멈춤이기라도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어느 순간 그랬으니 그것에게서도 추락에 멈춤이 끼어들었으므로, 알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잠, 깊디깊은 잠속에로 가라들기 전의, 제기럴 고달프기는 한 우주의 밤만큼이나 고달픈 그 눈으로 내어다보아 알아내고 있었는데, 자기가 하나의 진한 마늘냄새로, 제가 타 스러져 재가 된, 제 잿속에, 한 알(卵]의 붉음으로, 붉게 묻혀 있음을 알아내고, 있었는데, ……
(아으 저것은 다시, 촛불중의 그 사막(沙漠)의 연어(連魚), 불새 - 금오(金烏)의 얘긴 것이구나. 어쨌든, 저런 종류의 륜(輪)은, 만약에 쿠메루가 수메루의 정반극(正反極) 쪽에서 같은 산(山)이라면, ‘무(無)'라는 화두(話頭), 또는 그 기호(記號)와, 정반극(正反極) 쪽에서 같은 것일 것이다. “제 몸을 제 스스로 태우고, 그 재 속에서 새로 부화하는 불새”와, 화두(話頭), 또는 기호(記號)로서의 ‘무(無)'가 어떻게 해서 같다고 하는지, 그것을 알고 싶은 사미가 있거든, 사미여, 사미는 사미의 귓부리를 만져보거라.] (무(無)’라는 기호(記號)는, 어떤 성대(聲帶)를 통해 발음(發音)되어질 때만, 그 속(의미(意味))을 비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없음'이라는 그 의지(意志)의 잠을, '없음' 속에다 재워놓고 있는다. 발음되어진, 그 '없음이라는 의지(意志)’는 또, 왜냐하면 '없음'이 발음을 입었기 때문에, 태초 이전부터는 있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창조하는 자까지도 그것을 발음해본 적 없는, 그 ‘없는 자아(自我)'를 새로, 부지런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아나트만. 그리하여 본디의 ‘무(無)’ 속에로 되돌아와, 그 잠속에 안겨드는 ‘무(無)’의 씨눈 —— 없음의 의미(意志). 인세(人世)의 성대(聲帶) 속에 유폐된 ‘무(無)', 그리하여 그 성대(聲帶)의 횡포에 고초를 겪는, 절대적으로 무(無)한 ‘무(無)') 맵!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석양(夕陽)인데 ㅡ. 글쎄, 오늘 아침에도, (이것은 다시 금오(金烏)의 얘긴 듯하지만,) 동녘 복숭아 가지에 얹은 둥지를 떠났으니 유리(羑里)의 금까마귀는, 이 저녁에도 물론 그 둥지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어서, 석양(夕陽)인데, (유리(羑里)의 석양(夕陽)은 제기럴, 유리(羑里)의 하루보다도 긴 듯한 느낌이구나.) 그렇다면 이것은, (촛불중이여, 별로 걸르는 법 없이 행해왔던, 그 저녁종칠 시간), 석양제(夕陽祭)(Sandhya. Skt.)'를 지내야 할 시각인 것이다. 그런데도 촛불중은, 이 당장은 어떻게도, 자기의 몸 속에서, 자기의 의지에 좇는 움직임을 수복(收復)해내지를 못하고 있는 중이다.
-- 해(日)가, 저 유리(羑里)(사막(沙漠))의 상상력(想像力) 속에서는, (앞서 얼핏 밝힌 바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無)'라는 화두(話頭)가 사막(沙漠)에로 도입된 결과, 변용전신(變容轉身)을 겪어 나타난 것이 그것인데,) '화조금오(火鳥金烏)'의 형태를 띠어 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하는 재료인 듯하다. 유리(美里)에서는, 특히 촛불중에 의해서, '불의 물의 어(魚)’ 또는, (불사조(不死鳥)로도 알려져 오는, 사막(沙漠)의) ‘화조(火鳥)[금오(金烏)]'가, 한 수도자(修道者)의 “성대(聲帶)를 얻어 발음(發音)되어진, 어떤 의미(意味)가, 발음(發音)되어진 즉시, 다시 그 성대(聲帶) 속, 또는 어떤 특정한 기호(記號) 속에 잠드는, 그런 (언어(言語)'의 상징(象徵)”이 되어있어 그런 것인데, 저것은 그리고 물론, 신화(神話)에서 신의(神衣)를 벗겨내고 그 세(世)[실학(實學)]적(的) 부분을 드러낸 뒤 들여다본 얘긴데, 반대로 그것에다 신의(神衣)를 덮어보기로 한다면, 얘기는 다시 해오던 그 본디의 모습을 재수복하게 될 것이다. (촛불중에 의하면, 신화화(神話化)할수 없는 실화(實話)나, 실화화(實話化)할 수 없는 신화(神話)가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인고적(人造的)이어서, 유행성(流行性)을 띠고 있다고 하고 있다.)
주석 같은 거 보면 박상륭은 구조주의에 좀 영향을 받은 거 같은데 정작 읽어보면 거기다가 동양철학을 이상하게 쓰까놓은 거처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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