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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혹은 심지어 동료 예술가들과도 소통하지 않는다는 장정일 기사를 봤는데, 그리고 밑에 포스팅된 홍성준 작가의 블로그 글도 읽어봤는데, 지금 와서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얘기들 아닐까?
내가 시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지금 당시 미래파의 시들은 나한테 재밌고 흥미로운데 반해, 그 이전의 시는 지루하고 심심하게 느껴져서 전혀 오질 않는데. 물롬 아닌 시들도 많음. 미래피가 아니라고 의미 없다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라 불릴만한 많은 시들은 전혀 내게 호소하지 않는다는 거.
내가 읽은 미래파 시인들이라고 해봐야 황병승, 김경주, 신해욱, 김행숙, 김민정 등 뿐이긴 하지만...애초에 사람마다 분류도 다르고. 물론 저 시인들은 단순 소통 불가능, 자폐성 그런 거 이전에 걍 시를 잘 쓰는 사람들인 거 같긴 하다만...
하이패션이라는 게 우리의 인식 저평을 넓혀주듯이 오히려 저런 시들이 등장함으로써 오늘날 시의 풍토를 넓혀주니,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시인들의 시는 많이 말랑말랑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뭐랄까, 특유의 원자성이랄까, 예전의 서정시의 전형적 화자라고 불리기엔 차별화 되는 특수한 형태의 원자성이 존재하며, 무의미한 장광설 이후에, 산문화 되는 경향 등도 거기에 분명 영향을 받았을 거고. 뭣보다 미래파 시인들이 '빠따'를 맞아줌으로써 뒤의 시인들이 훨씬 부담 적게 시를 적게 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내 주변에 시 매니아들 보면 미래파 시들을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응축된 감정이나 에너지를 애호하니, 보통 서정시를 좋아하는 계층이라면 몰라도, 기존 시들에 약간 익숙해지면, 혹은 새로운 맛을 원하는, 다른 미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시가 더 감동적이고 오래 남을 것 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걸 소통 불가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문학이 사회적 영향력을 잃은 지금(김지영 같은 소설을 보면 아예 잃은 것은 또 아닌 것 같기는 하다) 참여시나 환경시 등을 그렇게 믿는 편도 아니고. 나는 그런 목표를 가진 시들을 쓸바에야 직접 말하고 운동하는 방식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시대의 징후라는 의견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미래파의 그것이야말로 문학으로서 한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근데, 당시 그렇게 미래파로 호명됐던 상당수의 시인들을 포함해서, 요즘 시들은 다시 부드럽고 잔잔한 서정시의 역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해서, 한떄의 트렌드였던건가, 싶기도 하다.
사실 나도 긍정하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시들이 유행처럼 폭발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분명 반작용이 있었고, 쓰는 입장에서도 읽는 입장에서도 피로감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홍 작가 블로그 글에서는 헤겔식의 변증법론적 경향이랄까, 참여시 - 순수시의 이분법을 경계하는 것처럼 적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술 역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예술이기에 항상 그렇게 발전하지는 않겠고, 오히려 시인 각각이 느끼는 이전 경향, 미학의 싫증, 지루함, 나태함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함.
따라서 애초에 미래파 시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하긴 했지만, 어찌보면 저런 주제로 심각하게 얘기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란 생각도 든다. 평론가들은 분류하고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저마다의 기준에 맞춰 시를 깔 순 있지만, 심각한 얼굴로 이건 시가 아니다, 문제다, 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스꽝스럽다. 지금에 와서는. 미래파는 소통이 불가능한 시가 아니라, 이전의 감수성을 가진 이들과는 다른 감수성이 등장 정도로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한 물결의 기수로 이름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렇게 하나의 축이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앞서 말한 참여-순수의 구도에 대한 반발 적용 정도로만 취급되는 건 아닐까. "극단적인 독자성의 긍정". 대개 "극단", "절대"라는 말은 부정적인 뜻을 함유하며 예술에서는 특히 그렇지만, 저 말은 지금의 나로선, 어떤 식으로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 밖에 안들긴 하다.
저 시기에도 전통적인 서정시는 씌여졌고, 미래파 시가 정말 소통이 불가능했다면, 당연히 역사적으로 도태됐을 것인데, 지금 나오는 시들보면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고, 그 말은 소통이 '작용'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그러니까 자연선택처럼, 시적 생태계에서 저런 말들이 심각하게 오고 갔다는 것 자체가, 앞서 말했듯, 사실은 지금 관점에서는 좀 웃기다.
물론 지금 관점이라 그런 거고, 몇몇 미래파 시인들은 저런 평론의 보호가 없었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론의 역할은 오히려 그쪽에 있지 않을까. 밀어내는 손길보다는 불러들이는 손길.
내가 시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지금 당시 미래파의 시들은 나한테 재밌고 흥미로운데 반해, 그 이전의 시는 지루하고 심심하게 느껴져서 전혀 오질 않는데. 물롬 아닌 시들도 많음. 미래피가 아니라고 의미 없다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라 불릴만한 많은 시들은 전혀 내게 호소하지 않는다는 거.
내가 읽은 미래파 시인들이라고 해봐야 황병승, 김경주, 신해욱, 김행숙, 김민정 등 뿐이긴 하지만...애초에 사람마다 분류도 다르고. 물론 저 시인들은 단순 소통 불가능, 자폐성 그런 거 이전에 걍 시를 잘 쓰는 사람들인 거 같긴 하다만...
하이패션이라는 게 우리의 인식 저평을 넓혀주듯이 오히려 저런 시들이 등장함으로써 오늘날 시의 풍토를 넓혀주니,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시인들의 시는 많이 말랑말랑하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뭐랄까, 특유의 원자성이랄까, 예전의 서정시의 전형적 화자라고 불리기엔 차별화 되는 특수한 형태의 원자성이 존재하며, 무의미한 장광설 이후에, 산문화 되는 경향 등도 거기에 분명 영향을 받았을 거고. 뭣보다 미래파 시인들이 '빠따'를 맞아줌으로써 뒤의 시인들이 훨씬 부담 적게 시를 적게 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내 주변에 시 매니아들 보면 미래파 시들을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응축된 감정이나 에너지를 애호하니, 보통 서정시를 좋아하는 계층이라면 몰라도, 기존 시들에 약간 익숙해지면, 혹은 새로운 맛을 원하는, 다른 미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시가 더 감동적이고 오래 남을 것 가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걸 소통 불가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문학이 사회적 영향력을 잃은 지금(김지영 같은 소설을 보면 아예 잃은 것은 또 아닌 것 같기는 하다) 참여시나 환경시 등을 그렇게 믿는 편도 아니고. 나는 그런 목표를 가진 시들을 쓸바에야 직접 말하고 운동하는 방식이 낫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시대의 징후라는 의견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미래파의 그것이야말로 문학으로서 한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근데, 당시 그렇게 미래파로 호명됐던 상당수의 시인들을 포함해서, 요즘 시들은 다시 부드럽고 잔잔한 서정시의 역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해서, 한떄의 트렌드였던건가, 싶기도 하다.
사실 나도 긍정하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시들이 유행처럼 폭발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분명 반작용이 있었고, 쓰는 입장에서도 읽는 입장에서도 피로감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홍 작가 블로그 글에서는 헤겔식의 변증법론적 경향이랄까, 참여시 - 순수시의 이분법을 경계하는 것처럼 적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술 역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예술이기에 항상 그렇게 발전하지는 않겠고, 오히려 시인 각각이 느끼는 이전 경향, 미학의 싫증, 지루함, 나태함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함.
따라서 애초에 미래파 시에 대한 논의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하긴 했지만, 어찌보면 저런 주제로 심각하게 얘기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란 생각도 든다. 평론가들은 분류하고 평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저마다의 기준에 맞춰 시를 깔 순 있지만, 심각한 얼굴로 이건 시가 아니다, 문제다, 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스꽝스럽다. 지금에 와서는. 미래파는 소통이 불가능한 시가 아니라, 이전의 감수성을 가진 이들과는 다른 감수성이 등장 정도로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한 물결의 기수로 이름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렇게 하나의 축이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앞서 말한 참여-순수의 구도에 대한 반발 적용 정도로만 취급되는 건 아닐까. "극단적인 독자성의 긍정". 대개 "극단", "절대"라는 말은 부정적인 뜻을 함유하며 예술에서는 특히 그렇지만, 저 말은 지금의 나로선, 어떤 식으로도 긍정하고 싶은 마음 밖에 안들긴 하다.
저 시기에도 전통적인 서정시는 씌여졌고, 미래파 시가 정말 소통이 불가능했다면, 당연히 역사적으로 도태됐을 것인데, 지금 나오는 시들보면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고, 그 말은 소통이 '작용'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그러니까 자연선택처럼, 시적 생태계에서 저런 말들이 심각하게 오고 갔다는 것 자체가, 앞서 말했듯, 사실은 지금 관점에서는 좀 웃기다.
물론 지금 관점이라 그런 거고, 몇몇 미래파 시인들은 저런 평론의 보호가 없었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평론의 역할은 오히려 그쪽에 있지 않을까. 밀어내는 손길보다는 불러들이는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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