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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없는 분야라는 건, 반대로 매혹적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즐거운 이유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관심 없는 분야가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데, 그 생김새가 꽤나 곱상할 경우 사람들은 거기에서 흥미를 찾게 된다.
더숲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이걸로 세권째가 되는데, 앞선 두 권의 책과 마찬가지로, 정말 아무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이었다.

바빌론의 역사! 평소에 관심은 없더라도 눈길이 가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하다못해 로마나 그리스의 역사도 아니고 바빌론? 이건 아무 생각없이 버스에서 내렸더니, 반대편 길목에서 연신 노릇한 밀가루 굽는 냄새를 풍기는 다꼬야키 집이랑 똑같다. 마주친 이상 먹어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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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를 읽으면서 제일 먼저 압도가 되는건 그 말도 안되는 숫자 단위다. 보통 여러분은 옛날 이라고 하면 얼마정도의 숫자를 가르키는가? 10년전? 100년전? 그럼 이제 중세를 떠올려보자. 12세기? 10세기? 더 뒤로 우리의 시간을 감아보자. 이제는 고대를 떠올려보자, 0년? 100년? 고구려 정도면 고대일까? 부여? 어느정도가 우리의 고대일까?

바빌론의 고대는 언제일까? B.C 4000년이 그들의 고대이다. 처음 마주해보는 미친 숫자를 눈 앞에 두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B.C 4000년에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긴 살았을까?

정말, 한반도에 사람이 살긴 살았나 의심스러울 정도의 그 옛날에, 최초의 바빌론 문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충분히 먼 과거는, 우리들로 하여금 환상으로 젖어들게 만든다. 바빌론의 역사는 그래서 나에게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 설명집을 읽는 느낌과 같은 환상감과 동시에, 분명히 이 지구상의 어느 시점엔가 실존했었던 과거의 역사라는 사실감을 동시에 주었고, 그 오묘한 기분을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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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 회담] 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어떤 출연자가 한 말이 있다.

"우리가 옛날이라고 말하면, 그건 기원전 2000년 정도다."

바빌로니아어도 충분히 고어인데, 바빌론 사람들도 수메르어를 고어고 사어지만 격식 있는 글자니까 배워두자면서 배운 것이다!!
이 파트를 읽으면서 얼마나 내가 어이가 없었고 놀라웠는 지는 직접 읽어봐야만 알 수가 있다.

마치 베르길리우스가 호메로스와 희랍 희곡 3대장을 언급하면서 "그때 그 시절은 좋았지..." 하던거랑 일맥상통했다. 심지어 베르길리우스로부터도 2000년은 더 전에!! 벌써 그런 말이 오고 갔던 것이다!


"수메르어는 좀 낡긴 했지만 뭐.. 수메르어로 쓰인 멋진 문서들이 있고... 어?! 너네 수메르어 배우기 귀찮다고 게을리 하지말고, 자기 이름정도는 수메르어로 쓸 줄 알아야 어디가서 부모욕 안먹는거야 알았지?"
같은 선생님의 뻔한 대사를 직접 들어보지도 않았지만 상상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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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바빌론은 어느 초기문명과도 같이 종교를 중심으로 뭉친 국가였다. 바빌론이 독립된 하나의 나라로서 지탱되는 것은 B.C 2000년 이후로는 흔치 않지만, 언제 이곳을 점령한 왕들은 이들의 특혜(면세권과 제사를 위한 지원)와 자치권을 인정해주었다.
바빌론은, 그냥 도시나 나라가 아니라, 신들이 내려오는 기둥이기 때문이였다.

논리적인 모습은 아닐 수도 있으나, 이런 시대의 나라들을 나는 좋아한다. 절대적인 존재자에 대한 존경에서 시작되는 그 융성하고 웅장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축제들은, 분명히 국고를 탕진시키는 좀과도 같은 것이지만, 어차피 뭐 내 나라도 아니고 이미 오래전에 망한 나라인데다 나는 고작해야 유적으로 만나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런 웅장함을 느끼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빌론은 그런 나의 취향에 아주 적합했다! 수메르 유역의 지배자들은 그 강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성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바빌론을 수탈하는 것을 상상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면세권이라는 특권과 신들을 기쁘게 하기위한 축제에 대한 지원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바빌론은, 지금은 그 모습을 다 바라볼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얼마나 웅장했을까... 베르길리우스가 그리워하던 사트르누스의 땅 조차도 바빌론만큼 아름답진 않았으리라.. 아니, 오히려 그 사트르누스의 땅이 바로 바빌론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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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유희왕 카드를 좋아했다. 그때 당시에는 포커나 섯다를 칠게 아니라면, 유희왕 만큼 룰도 잘 만들어지고, 캐릭터들이 멋들어진 카드놀이는 없었다.

섬세한 규칙들과 티어를 나눠서 구별되는 카드들, 그리고 핵심이 되는 코어 카드들의 위계 속에서 어린 나는 행복했다. 유희왕의 규칙 속에서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가다가 끝에서 푸른 눈의 백룡 두 마리를 한번에 소환해서 원턴킬을 내면 어딘가에서 카이바가 나를 축복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어느날인가, 유희왕이 정말 쓸모없다라는 걸 느꼈다.

애들이 유희왕 카드게임에서 벗어나서 에어소프트건으로 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나의 백룡들에 언제나 유린당하던 한 친구는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줬다는 전자동 카빈소총을 들고 놀이터에 나타났다. 전재산을 유희왕에 투자한 나는 허섭스레기 권총 하나만을 들고 놀이터에 놓여있었다. 내 권총의 탄창을 고작해야 50발 정도였던데에 비해 그 친구의 총에는 500발은 족히 들어갔고, 총알을 말그대로 퍼부었다.

내 백룡은 비비탄 놀이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함정 속으로를 들이민들 그 친구가 카빈소총을 내려놔줄 이유는 없었다.



바빌론이 무너지는 챕터를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긴 역사동안 수 많은 왕들은 마르두크의 총애를 얻고자 노력했었는데, 이방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들어와서는


"마르두크가 뭔데 씹덕들아 ㅋㅋㅋ 모르겠고 세금 내라고 ㅋㅋㅋㅋ. 너네 돈 많네 ㅋㅋ 너네가 더 내라 그럼"
이라고 칼을 들이밀면서 말한 것이다. 아예 다른 게임을 해버리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체제 안에서의 논리밖엔 없는 사람들은 복종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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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함은 특이한 감각이다. 우리는 유추할 순 있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순 없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 신비로워한다.
마르두크가 사랑했던 도시는 이제 영영 우리의 육안에 관찰 될 가능성이 없어졌다. 독재자의 과시욕이 그걸 영영히 망쳐버렸고, 독재자를 진압하려던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이나 영영 멀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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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산"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남긴 지식은 여전히 우리의 곁에 있다. 그 유적의 초석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이다. 바빌론은 사라지도록 지어진 도시였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건축에 사용한 마른 벽돌은 계속해서 수리를 하지 않는한 100년이내로 사라지는 소재였다.
마르두크에게 사랑받던 도시는, 그렇게 우리에게 추측을 통해서만 남겨질 위대한 도시의 이미지를 안겨주고 영영 마르두크의 품으로 돌아가버린게 아닐까?









이 책에는 값지고, 정성스럽게 수집했음이 드러나는 많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더숲에서 나오는 책들은 언제나 자료를 성실하게 수집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자료들은 그들에게도 값질 것임이 틀림없기에, 이 서평을 보고 혹한 애독가들이 부디 직접 책을 읽으며 이 정성스러운 자료를 나와 같이 즐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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