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유언들 p. 332


수십 년간 반(反)전체주의 전문가들에게 늘 참고문헌으로 애용된 책, 오웰의 <1984>다. 가상 전체주의 사회의 무시무시한 초상화이고자 하는 이 소설에는 창문이 없다. 이 소설에는 항아리에 물이 차기를 긷기다리는 연약한 어린 소녀를 보는 일이 없다. 이 소설은 시에 물 샐 틈 없이 닫혀 있다. 소설이라고? 소설을 가장한 정치사상이다. 이 사상 역시 물론 명철하고 정당하지만 일그러져 있다. 소설적 가장이 그 사상을 부정확하고 개략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소설적 형식이 오웰의 사상을 흐려 버린다면, 이에 대해 뭔가 보상해 주는 것이 있는가? 여기서 소설 형식은 사회학도 정치학도 다룰 수 없는 인간적인 상황들의 미스터리를 밝혀 주는가? 아니다. 이 소설에서는 상황이나 등장인물이 광고 포스터처럼 진부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좋은 이념들을 대중화한다는 구실로 정당화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소설화된 이념들은 더는 이념으로 작용하지 않고 바로 소설로 작용하며, <1984>의 경우 그것들은 나쁜 소설로 작용하면서 나쁜 소설이 끼칠 수 있는 온갖 악영향을 끼치는 까닭이다.


오웰 소설의 악영향은 어떤 현실을 순전히 정치적인 측면으로 감쪽같이 축소하는 데 있으며, 또한 바로 그 측면을 그 측면의 완전히 부정적인 일면으로 축소하는 데 있다. 나는 전체주의 악에 대한 투쟁의 선전에 유용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축소를 용서해 주길 거부한다. 왜냐하면 인생을 정치로 축소하고 또 정치를 선전으로 축소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 악이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오웰의 소설은 전체주의 정신에, 선전 정신에 가담한다.




개인적으로 이렇게까지 얘기안해도 노골적이고 투박한 1984라는 소설이 재미없고 싫었음.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돌아가는 독재 정권이라는 역사가 없었으면 다들 눈여겨 보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함. 뭐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서도.




+) 공산주의가 끝나고 일이 년쯤 지나 체코인들과 얘기를 나누었을 때, 으레 나는 어느 대화에나 등장하는 상투어, 그들의 모든 성찰, 그들의 모든 추억의 필수 머리말이 되어 버린 상투어들을 듣곤 했다. "공산주의 공포가 끝난 지 사십년 후"라거나 "공포의 사십 년", 특히 "잃어버린 사십 년" 같은 표현들이다. 나는 나의 대화 상대들을 살펴본다. 그들은 강제 이주당하지도 않았고, 수감되지도 않았고, 직장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백안시된 일도 없다. 그들 모두는 그들 조국, 그들 아파트, 그들 직장에서 그들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휴가, 그들의 우정, 그들의 사랑을 누렸다. 그들은 "공포의 사십 년"이란 표현으로 그들 삶을 오직 정치적 국면으로만 축소한다. 한데 과연 그들은 그 흘러간 사십 년 정치사를 정말 무차별적인 단 하나의 공포 더미로만 체험했을까? 포르만의 영화를 관람하고, 흐라발의 책을 읽고, 반체제적인 소극장들을 드나들고, 온갖 농담을 주고받고, 즐겨 권력을 조롱하며 보낸 세월들은 모두 잊어버렸는가? 그들이 하나같이 잃어버린 사십 년을 말하는 건 삶의 추억을 오웰화(化)해 버렸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의 삶은 그들의 기억과 그들의 머릿속에서 가치를 상실해 버렸거나 완전히 말소되어 버린(잃어버린 사십 년) 것이다.


바로 뒷 페이지에 나오는 얘긴데 보충 설명이 될 거 같아 추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