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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색의 삶과 생각을 시나 산문을 통해 살펴본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색은 고려 말 대유(大儒)라고 불릴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와 산문을 남긴 문장가이기도 하다. 시를 통해 이색의 사상을 알아본다는 것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시는 함축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에 시로 한 인물의 사상을 온전히 탐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기존의 자료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이색의 시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시와 이색의 행보를 볼 때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아버지 이곡에 이어 원의 제과에 합격하고 원에서 관리생활을 했음에도 원. 명 교체기에 중원의 지배자가 바뀌자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유학자임에도 신돈 정권에 참여하였으며,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 건국에 대해서도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단지 고려 말 격동깅 심신이 지쳐 있었을 뿐이엇다.
이색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불교이다. 일반적으로 이색은 불교에 호의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색은 불교 승려와 어울렸고, 효도를 이유로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학을 항상 불교보다 우위에 놓는 유학자였으며,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정쟁에 휘말리면서 여러 고난을 겪자 마음이 약해져 불교에 대해 점점 호의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 승려와의 교류 역시 불교 자체보다는 인간대 인간으로 만난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색은 개혁파 사대부들과 조선의 유자들에게 '불교에 아첨한다.' 라는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성리학이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기 전인 고려말에 이색이 이러한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당시 성리학자의 대표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 시관을 4번이나 맡을 정도로 당시 명망이 높았던 학자인 이색이 불교에 호의적인 것을 유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합하자면 이색은 현실적으로 당시 정세를 판단했고, 이를 근거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으나 그의 사상은 격동기를 지탱하기에는 부족했고, 이색은 격동기의 혼란 속에서 아들과 애제자 이승인을 잃고 방황하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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