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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카시러, 국가의 신화


카시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년 되지 않은 1959년에 나치즘과 파시즘에 깃든 파괴적인 신화적 사상이 어디서부터 연유되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고대에서부터 신화와 국가가 무엇이었는지 탐구하고 있다.

 

신화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고대 혹은 원시 사람들의 신화적 사고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삶의 다양성을 통일하려는 것이다. 이 통일은 만물에 깃든 생명에 참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물리적, 사회적, 자연적 관계들은 하나의 영역 안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 통일은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닌 원시 민족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정동적(감정 + 행동?)인 것이다.

 

그리스 종교

그리스에서도 정동적인 신화의 특성은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는 논리적 정신이 강조된다. 이 논리는 상징의 논리다. 상징은 언어적인 것으로,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객관화시킨다. 객관화된 신비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동물에게 죽음은 그저 두렵고 피해야 할 것이지만, 인간에게 죽음은 이해의 대상이 된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에 대해 신화적인 이해가 아닌 규칙으로 이해한다.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에 대한 탐구는, 시인들이 말하는 신화를 벗겨내고 신화 배후에 있는 참된 신, 일자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바꾼다. 우주가 아닌 자기, 곧 인간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플라톤과 국가

플라톤에게 인간을 논하는 것은 인간이 속한 사회, 곧 국가를 논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씨앗은 좋은 밭에 심겨져야 잘 자란다. 그런데 사람은 신들에 대한 생각을 따라 국가의 이상을 생각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국가를 논하면서 신화의 신들을 이데아로 대체한다. 이데아에 속하는 이상 국가에는 신화에 내어줄 자리가 없었다. 여기서 이성의 위치가 강조된다. 이데아와 현상계 사이에 경계가 있고 신화는 이 경계를 없애려 든다. 논리학과 변증법은 세계를 구분하는 것, 곧 신화를 없애는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 철학을 헬라 철학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존재한다. 자기 인식에서 시작한 철학적 탐구는 절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신이 아니고서는 무엇인 진리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진리는 이성의 긴 여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은 가까이 있다. 이데아와 달리 인격적인 신은 의지가 있으며, 자기를 계시한다. 이 계시된 진리의 절대적 우위성은 중세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했던 이성보다는 계시가 우월하다.

본 저서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다. 그리고 국가에 있어서, 고대와 중세의 연결은 그리스 철학보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에는 불평등이 있고, 인간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는 스토아 사상에서 기독교 윤리와 동일한 인간의 근본적 평등을 볼 수 있었다.

계시와 인간의 본래적 평등. 이것이 중세 국가관의 기초였다.

 

중세 국가

중세 국가관은 매우 통일성 있는 체계였다. 루소가 보았던 현실의 모순, 인간은 자유롭지만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세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실의 국가는 완전한 선이 아니다. 국가는 무정부라는 더 악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타락한 세상에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허용한 것이다. 이 불완전한 국가는 더 완전한 국가를 향하고, 그 나라와 통일되어 있다. 이는 국가에 대한 계시적 관점이다.

그러나 이성을 강조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국가를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그 이성이 계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성을 사용해, 의지를 사용해 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중세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위의 세계와 아래의 세계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봉건 제도는 신이 통치하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의 현세적 표현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작 군주론을 통해 근대적 세속 국가의 기반을 닦았다. 정치적 권력은 신적인 권력이 아니다. 종교는 정치의 도구다. 그의 사상이 향하는 바는 현대적 국가이고, 세속적이고 자율적인 국가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중세는 국가, 윤리, 종교, 철학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계였다. 여기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관은 그 결과로 도덕의 결여를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정치적 지형이 변하고 사람들이 자연법을 당연시 여겼던 19세기 초까지 유보되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군주론을 자신의 이상에 맞게 오독했었다. 그러나 그 저서가 말하는 바는 정치의 기술이다. 기술의 영역에 선과 악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플라톤과 결별한다. 플라톤의 기술은 보편적, 실천적, 윤리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기술은 그저 기술이다.

군주론의 25장은 운명을 논한다. 인간 세계는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영역이고, 그렇기에 자연과학과 다른 영역이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인간은 그 운명에 저항하는 자다.

중세의 운명은 신의 섭리다.

마키아벨리에게서 그 운명이라는 상징은 세속화되었다.

 

근대

17세기 사상가들은 정치 과학을 버리지 않았다. 정치의 원리가 있는가?

여기서 스토아학파의 재생을 보게 된다. 교회의 권위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보편적 윤리를 스토아 사상에서 찾았다. 신학의 감시에서 해방된 자율적 이성에서 자연법이 도출된다.

국가는 계약에 의한 것이다. 근대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시초가 아니라 국가의 기능이며, 타당성이며, 법적인 근거였다. 사람들은 국가에 복종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성만은 남아 있었다.

 

18-19세기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독창적인 이론을 내놓기보다 정치적 실천을 중시했다.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꾀했다.

낭만주의 사상가들에게 국가는 인간 의지의 산물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시적인 언어로 표현했다. 곧 신화적인 사고였다. 그들은 국가간 차이들을 사랑했고 동시에 중세 세계의 종교적인 통일성을 동경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18세기와 19세기는 나뉜다. 계몽주의자들의 무너질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 사고는 파기되었고, 독일의 위기 앞에 낭만주의적인 열정은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낭만주의자들은 아직 보편적 이상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19세기 : 20세기에 대한 준비

여기는 제 3[20세기의 신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저자의 분석의 초점은 19세기에 형성된 세 사람의 사상에 집중되어 있다. 칼라일의 영웅 숭배, 고비노의 인종 숭배, 헤겔의 국가 이론은 20세기 신화적 사고의 복고와 전체주의의 탄생에 책임이 있는 사상으로 비판받는다.

 

1) 칼라일의 영웅 숭배

칼라일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생활에서 영웅이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영웅은 세속화된 성자다. 선택된 소수가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상 오딘, 볼테르, 루터, 볼테르 등의 영웅들은 숭배되어 왔고, 각자의 역사를 썼다.

그의 철학에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사람들에게 영웅 숭배가 인간의 본능이며, 이것이 없으면 멸망이라고 호소할 뿐이었다. 영웅에게는 도덕적인 힘이 있다. 어떤 도덕인지보다 도덕적 행동의 강도가 중요하다. 힘은 정의다.

 

2) 고비노의 인종 숭배

칼라일이 인간 개인에 주목했다면 고비노는 그 인종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칼라일이 영웅은 태어났을 때에 동일하다고 보았다면 고비노는 출생에서부터 다르다고 보았다.

귀족 태생인 고비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는 이 답을 인종에서 찾아냈다. 인종 간 도덕적, 지적 차이는 명백하다. 그에게 존엄성이란 개인적 우월성이며 인간은 남을 내려다보지 않고는 우월성을 의식할 수 없다.

고비노에게서 전체주의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고비노의 제1원리는 인종이다. 종교, 도덕, 예술 등은 인종에 기초해 있다. 기독교는 문화와 도덕에 영향을 준 바가 없으며 애국심은 셈족에게서 나온 것이며 법률은 로마에게서 예술은 흑인에게서 나왔다.

 

3) 헤겔의 국가관

20세기 볼셰비즘, 파시즘, 나치즘은 헤겔의 철학을 분해하고 이용했다. 비록 그것이 온전한 헤겔의 사상이라고 볼 수는 없어도, 막대한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

헤겔의 정치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종교와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는 종교와 역사를 통일했다.

종교 영역에서 그는 세계에 존재하는 악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역사는 정신의 발전이다. 역사에서 대립은 필연적이다. 대립이 없다면 역사는 생명이 없는 것이며, 의미를 상실한다. 역사에서 인간이 찾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활동이고 힘이다. 인간의 희망과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자체의 법칙이 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 보편 이성이다.

이데아는 현실을 초월한 곳에 있지 않다. 이데아는 인간의 사회와 정치 속에 있다. 그 이데아, 그에게 이성이라 불러야 할 것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면서 힘 있는 본질이다. 역사 자체가 바로 신의 계시다.

그리고 국가란 역사의 본질이다. 국가는 이성의 표현이고, 완전한 현실이다. 19세기 초까지 국가의 사회계약론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인간성이라는 도덕적 부분에서 제한적이다. 그러나 헤겔은 도덕의 관념을 바꾸었다. 그것은 주관적일 뿐이다. 국가는 도덕적 의무에서 자유하다. 국가의 의무가 있다면 자기 보존이다.

헤겔의 국가 숭배는 영웅 숭배와 결합된다. 영웅이 가진 힘은 도덕과 상관없다. 인간의 욕구와 열정이 역사를 이끈다. 그리고 그 개별 인간은 세계 정신의 대행자다.

역사의 모든 시대마다 세계 정신을 대표하는 민족이 하나 있으며, 그 민족은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

 

위의 세 사람의 철학들이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철학 속에는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요소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사상의 토대를 제공했다.

 

20세기

현대 정치적 신화의 수법

1) 사회적 조건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절박했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신화에 호소한다. 원시 사회의 사람들도 일상 속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마술적 수단을 찾는다. , 절박한 상황 속에서 집단은 지도자를 원한다. 그 지도자는 카리스마 있는 존재이며, 집단의 욕망을 표상하는 존재다. 그 욕망 앞에 도덕은 상관없게 된다. 물론, 현대인은 원시인과 다르다. 그들은 세련된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론적 토대는 이미 제공되었다.

2) 정치적 신화

독일은 정치적 신화를 형성했다. 그 신화란 무엇인가. 첫째,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 그 언어는 정동적 언어로 정치적 격정을 일으킨다. 둘째, 정치적 제의(특정한 행동)를 도입한다. 꾸준히 의식을 행하는 가운데 개인의 책임은 제거된다. 개인은 개인이 아닌 집단이 된다.

저들이 원시적 신화적 힘 앞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현대인도 동일한 환경 속에서 그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신화는 사람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그러나 사람은 억압 속에도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닌 창조하는 것이다.

3) 점술

원시적 점술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점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역사가 운명적으로 흘러간다는 신화적인 특성을 지닌 역사의 형이상학이 있다.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같은 저작들이 독일 정치 이념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문명의 몰락과 역사의 불가피성을 말하는 철학은, 인간이 정치적 신화에 대항할 힘들을 무너뜨린다.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치학은 아직 과학이 되기에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견고한 기초가 아직 없다. 사람들이 어떤 관념을 가지고 국가에 강요하려 할 때, 이것이 승리할 것처럼 보여도 항상 실패해왔다. 이는 정치에는 인간이 복종해야 하는 모종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둘 중 하나임. 아직 인간은 그 법칙을 모르거나, 완전하고 영원한 정치철학은 없다거나. 후자 같음. 인간이 아무리 새롭고 통찰력 있는 철학을 내세워도 그것도 다만 불완전할 뿐이라는 것.)

철학은 정치적 신화를 파괴할 수 있다. 신화적 사고는 언제까지나 영속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윤리적, 예술적 세력이 힘을 갖는 한, 신화는 진압될 것이다. 반대로 그 힘을 잃으면 혼돈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감상

카시러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과 도덕, 그리고 자유다.

 

카시러에게 신화적 정동성과 철학적 이성은 서로 대립한다. 신화는 인간을 그릇된 길로 이끌며, 헛된 희망을 추구하게 만든다. 20세기에 일어났던, 인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사건의 배후에 있던 것이 바로 이 신화적 사고다.

신화적 사고는 통일하고 이성적 사고는 분리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해 기독교 철학이 지배하던 시기는 이 분리가 유지되고 있던 때로 볼 수 있다. 무엇을 분리하는가? 현실과 이상이다. 세속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현실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그 분리가 있는 한, 현실은 이상을 향할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이상적 원리는 무너졌지만 자연법은 남아있었다. 도덕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사람들은 이 신뢰를 버렸다. 20세기, 격동의 시기에 사람들은 집단의 욕망에 휩쓸려 자유마저 버렸다. 이 자유는 책임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그 때의 사람들이 자유를 버렸다고 무어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를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오히려 자유를 포기할 때 개인의 무거운 책임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개별 인간에겐 이 자유를 행사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카시러의 진단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쟁 후에도 사람들에겐 이성과 도덕과 자유는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힘을 잃는 순간, 신화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화를 다루는 카시러의 글에서 조던 피터슨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조던 피터슨은 오랜 과거에서부터 신화를 통해 말해진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세계가 질서와 혼돈 사이를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시러는 질서의 세계를 원한다. 혼돈의 힘은 강력하고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질서의 세계에 이성과 도덕과 자유가 있다. 혼돈의 세계에 통합과 도구와 욕망이 있다. 어쩌면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을 브리콜라주로 볼 수도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적 인간을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을 목적에 따라 혼용하며 사용하는 자로 묘사한다. 미술 양식을 생각하면 쉽다. 브리콜라주 양식에서 연관 없는 물건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중점은 다르다. 그는 현대인과 원시인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시인은 그 나름의 과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시적 과학을 가지게 했던 그 신화적 사고는 카시러의 판단처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카시러는 저서의 초반부에 신화를 원시적 철학이라고 보았던 프레이저와 같이 관념적으로 신화를 본 사람들의 주장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가 주목한 것은 신화적 정동이다. 신화의 진정한 본성은 관념에 있는 것이 아닌 정동에 있다. 그렇다면 그 정동 없는 이성, 도덕, 자유는 지속 가능한지, 그 정동의 가치를 배척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슐라이어마허의 직관적 감정으로 대변되는 종교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도덕을 지키기 위해선 그에 결부된 정념과 의지가 필요하다. 칸트와 피히테는 이를 종교적 체계를 이용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종교성은 인간의 감성이 결여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강조되어야 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것은 도덕의 내재성이다. 이성과 도덕과 자유가 중요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인간 내면의 힘이다. 그 힘은 우리가 종교성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감정이지만 감정 이상이고, 의지이지만 의지 이상이다. 그것을 위해선 다른 것이 희생될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일찍이 로버트 벨라는 미국의 종교를 분석하며, 미국인의 종교를 시민종교라고 불렀다. 미국인은 자유와 인간의 권리를 믿는다. 이것은 건국의 때부터 기독교의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것이나, 그 가치를 담고 있는 이야기는 변했다. 모세는 링컨이 되었고, 스룹바벨은 린든이 되었다. 미국적 가치는 미국인의 정신에 종교로서 각인되었다. 물론 현대에 그 정신은 흔들리고 있다지만 오랜 기간 그 가치가 지켜져 왔고 거기엔 모종의 종교성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신화적 정동성을 그저 원시적이고 혼돈을 불러일으키는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상 배척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철학을 놓아버린 인간에게 엄습하는 신화의 위협이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인가가 문제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욕망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무언가 지켜져야 한다면 그것은 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엔 끊임없는 투쟁이 요구될 터이다. 어쩌면 가장 커다란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을지 모른다. 저곳에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산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적이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다만 중세적 사고는 도움이 된다. 각 사람에게 선을 향한 추구가 있다는 희망이다.


-끝-



참고로 내용 정리는 내가 편집하고 단어도 바꾸고, 축소한 것이 있어서 각 사람의 사상이 다소 왜곡되게 나타날 수는 있음.
예를 들어 헤겔 철학이 고작 위의 내용이 다는 아님. 저기에 더해서 저자가 말한 바는 더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