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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독갤에서는 계속 라노베 떡밥이 도는 걸까

사실 너희들... 라노벨을 사랑하는 거 아니니???




라노벨은 어떻게 수십권이 나오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실 간단하게 답하려면 되게 쉽긴 하다.

라노벨이 아니면서 몇십 권이 나오는 책,

예컨대 해리포터라던가 노빈손 시리즈 같은 건 어떻게 몇십 권씩 나왔는가?



그냥 장기 연재가 가능한 떡밥을 가지고 길게 쓰거나,

옴니버스 구성을 적용, 같은 인물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계속 하면 된다. 끝.




...근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버리기에는 좀 섭하다.

테메레르 시리즈라던가, 퍼언 연대기라던가(국내에는 3권밖에 정발 안 되긴 했지만), 익스팬스 시리즈라던가(생략)...

두께상으로는 라노베 십수 권은 족히 넘을 분량의 장기 판타지/SF 장르문학이야 흔하고

아마 대체 그런 게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유동이 질문을 한 건 아니리라.



그렇다면 다른 통속소설과 라이트노벨은 어떻게 다른가?

라이트노벨은 일단 기본적으로는, '3~6개월에 1권'의 발매 텀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거 같다.

실제로 이렇다기보다는 약간 관념적인 개념에 가깝긴 하다.

그래도 적어도 '연재'로 성립하려면 6개월~1년에 한 권의 책 정도는 나와줘야,

시리즈에 대한 팬층의 관심이 유지될 수 있는 것도 분명하겠지.


(실제로, 국산 라이트노벨 대다수가 폭망한 것은 퀄리티의 문제보다는 이런 꾸준한 연재 문제가 더 심각했고

결국 매일 6000자에 달하는 분량이 꼬박꼬박 올라오는 웹소설 쪽으로 시장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다.)




이런 '집필 시간의 제한'은 라이트노벨 작가에게 꽤 크게 다가온다.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주간만화 연재가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노동강도를 요구하는지

여러 매체에서 익히 봐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라이트노벨이 주간만화만큼이나 빡빡하다고 묻느냐면 그건 분명 아니겠지만,

어시스턴트 같은 외부 도움을 받기 어렵고, 전업작가가 아닌 사람도 상당수고...


그러니 그냥 단순히 작가가 노력해서 글을 빨리 쓰는 것만으로는,

독자들의 관심이 유지되는 동안 다음 권을 발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 생산양식은 그 사회의 구조를 결정한다. 

라이트노벨이 만화에 가깝다는 것은 그 내용과 소비자층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집필 환경에 있어서 그냥 '단행본 두세 권이 한 번에 연재되는 만화'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즉 라이트노벨은 작가가 제한된 시간 내에서 1권의 완성된 플롯과 분량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서

이미 만화나 타 매체에서 검증되었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발명된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1. 시리즈 내에서의 유사한 서사 구조 반복.


쉽게 생각해 셜록 홈즈 시리즈나, 해리 포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왜 둘 다 영국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셜록 홈즈 시리즈는 이후의 추리소설이 전형이 되는 서사 구조를 완성했다.


'홈즈가 따분해한다 -> 의뢰인이 사건을 가져온다 -> 홈즈는 의뢰인에 대한 자질구레한 사실을 추리한다

 -> 미스터리한 사건이 설명된다 -> 홈즈는 다양한 수단으로 단서를 모은다 -> 범인이 밝혀진다.'



해리 포터 시리즈도 비슷하지,


'더즐리 가족내에서 고통받는 해리 -> 호그와트로 돌아온다 -> 새로운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와 새로운 사건

 -> 그리고 이 미스터리는 볼드모트와 관련되어 있었다 -> 그리핀도르가 기숙사 점수에서 이긴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퀴디치 이야기나 시험 이야기도, 플롯 요소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되고.



장편 연재물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반복적 도식을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라이트노벨은 이걸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일본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르적 도식(마법 전투를 가르치는 학교, 개성적인 인물들이 뭉친 교내 동아리 등등...)을

라이트노벨 식으로 변주하여 해당 작품의 반복적 도식을 먼저 설계한 다음,

이 도식에 맞게 캐릭터와 서사를 배치하여 이야기를 빠르게 만들어내는 작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내 급식시절을 대표하는 '금서목록 도식'이라고 할 법한 작법이 있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이라는 라이트노벨에서 정립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장르로,

연애 요소와 액션 배틀물 요소를 조화시키면서 플롯을 빠르게 집필하는 데 최적화된 스타일이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셜록 홈즈의 의뢰인'을 

'우연히 마주친, 불행한 처지에 놓인 여자아이'로 치환하는 것이 골자다.


주인공은 대개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이거나, 혹은 적어도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각 권의 도입부에서 이 인물은 이 권의 '히로인', 즉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여자아이를 알게 된다.

주인공의 측은지심은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가장 큰 동기가 되는 것이 보통이고,

이 과정에서 적들의 공격은 물론, 그 '히로인'의 거부나 자포자기와 같은 문제들을

자신의 용기와 이전 권들에서 쌓아 놓은 인간관계들로 어떻게든 타파해 나간다.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악당과 싸워 물리치는 것으로 이 히로인을 구원하고,

이를 통해 승리의 카타르시스와 '공주님을 구해 냈다'는 쾌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금서목록은 이 도식을 40권이 넘도록 우려먹었고,

거의 매 권마다 새로운 히로인들을 등장시킨 나머지, 지금은 누적된 '히로인'만 어마무시한 숫자다.

(다섯 자리수의 하이브 마인드 클론 병사들은 빼고 세어도 말이지)

아무리 성공적인 양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금서목록 외의 다른 작품에서까지 이 유형이 반복되니까

결국 독자들이 증식하는 히로인들에 지쳐 나가떨어질 만도 하지.


지금은 라노벨의 메인스트림이 이런 '금서목록식 배틀'에서 '동아리'로, 다시 '이세계'로 넘어간 상태다.

결국 라이트노벨 시장에서도 유행하는 구조는 10년 정도의 수명이 한계라는 게 아닐까.


하지만 라이트노벨은 본질적으로 스낵 컬처고, 10년이라면 출판사 입장에서는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말하지만 손이 느려도 6개월에 1권 정도는 꾸준히 신간이 나와줘야 되는 라노벨 시장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면, 어지간한 인기작이 아닌 한에야 완결이 진작에 났어야 하는 거고.




메인스트림을 따라가지 않는 라이트노벨들도 구성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대개 비슷하다.

장기나 농구 같은 소재를 다루는 스포츠물들은, 대개 소년 만화의 스포츠 성장물 구성을

라이트노벨에 맞게 적절히 변형시켜 사용하는 경향이 크다.

이 갤러리 사람들이 싫어도 알게 된 '늑대와 향신료'와 같은 로드무비 옴니버스 구성도

잔잔한 감성을 추구하는 라이트노벨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구성.




개인적으로 라이트노벨을 즐기는 법은 바로 이런 구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얼마나 구성을 세련되게 짜 놓았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이 구성에 어떤 변주를 줄 것인가.

말하자면 푸가를 즐기는 기분으로 이 반복의 울림을 감상하는 것이다.





2. 미연시의 유산인 '독립된 보너스 플롯으로서의 장면'



독갤에 미연시를 하나라도 해 본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거의 해 본 게 없긴 한데, 일단 개념은 대강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연시에서는 흔히 '이벤트 CG'라고 하는 개념이 있다.

쓸데없이 거창하게 말해 선택지를 통한 인터랙티브/하이퍼텍스트 문학...인 미연시에서는

특정한 선택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극 중의 상황이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눈치와 세이브파일을 통해 이 상황에 접근하는 데 성공하면,

흔히 극 중의 상황을 묘사하는 근사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찾아낸 이벤트 CG는 따로 감상할 수도 있게 만드는 게 보통이고.



이벤트 CG는 극 중의 중요한 장면이나, 결말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이벤트 CG는 중요하니만큼 플레이 중에 자연스럽게 수집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플레이어가 애써 찾게 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극 진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서브플롯,

예컨대 여자애랑 도시락 까 먹는 장면 같은 게 되기 십상이다.



클라이맥스나 결말보다도 사소한 장면을 더 찾게 된다.

이건 오타쿠 컬처의 작품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보너스 플롯 개념과 '이벤트 CG'의 개념은 라이트노벨에 그대로 흡수된다.

라이트노벨이 '삽화가 있는 소설'이라는 개념 때문에 흔히 착각하는 게 있는데,

사실 라이트노벨 내에서 표지 바로 뒤의 컬러 삽화를 제외하고 흑백 삽화만 세자면

기껏해야 10장+a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삽화의 내용도 되게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냥 '얘는 이렇게 생겼어요'나 '필살기 연출입니다' 정도에 지나지 않고.


즉 흑백 삽화는 내용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이 내용에 도달했다'는 보상에 더 가까운 식으로, 즉 이벤트 CG와 비슷하게 기능한다.



그리고 이런 삽화는 중요하지 않은 장면에서도,

가사가 서투른 여자애와 같이 요리를 한다던가, TV를 보면서 실없이 떠든다던가,

같이 콘솔 게임으로 신나게 오락을 즐긴다던가 하는 장면에서도 충분히 나온다.

물론 플롯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냐고 묻는다면, 작위적인 복선을 깔려고 용쓰지 않는 한

기껏해야 '이 둘은 친해졌습니다' 정도의 기능에서 끝인 경우가 태반이겠지.


하지만 재차 강조하건대, 이 중요하지 않은 장면을 오타쿠 컬처에서는 순수하게 즐기고자 한다.

하물며 귀여운 그림까지 딸려 오는 여자애인데, 그냥 썸 타는 장면으로 즐기면 되지 않냐는 식이다.

혹은 그걸 넘어서, 이런 무의미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라고 단언하는 느낌도 있다. 



가끔식 라노벨식 만담이나 일상 묘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본인은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의 해괴한 소리들을 주인공이 들어주는 장면이

일반 소설에서 나오는 묘사 중, '라이트노벨식 만담'에 가장 가까운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장면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그 극적 효과를 분석하지 않고도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고 생각한다면

오타쿠들은 라이트노벨을 읽으며, 물론 퀄리티는 덜하더라도, 비슷한 정취를 느낀다고 생각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들을 'TV 예능의 소설화'라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라이트노벨 캐릭터들이 서로 말꼬리를 잡으며 끝도 없이 콩트를 벌이는 것은, 그저 '무한도전'의 소설화이고,

밥 해 놓고 맛있게 먹는 건, '나 혼자 산다'의 소설화에 가깝다는 식이지.

코미디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과장된 행동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라이트노벨은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베이스로 한 예능적인 인공물을 텍스트로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보너스에 가까운 서브플롯들은

소설의 분량을 뻥튀기시키고, 주요 캐릭터들을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다.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학교라면 달마다 학예회다 시험이다 체육대회다 이벤트가 생기고,

도시는 화려한 볼거리들로 가능하며, 심심하면 신칸센을 타고 바다와 산으로 떠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는 작가가 캐릭터를 극에 녹여내기 위해서

대단히 참신하고 현실적인 사건을 궁리해야 하는 수고를 크게 덜어준다.

남녀가 서로 거리가 좁혀질 만한 개성적인 사건을 하나 궁리하는 것보다는,

그냥 '시험기간이라 집에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는데, 지우개 떨어트린 걸 주워주려다 스킨십이 생기고,

그렇게 젊은 청춘남녀의 몸에 불이 붙으려는 찰나 어머니께서 간식을 들고 방에 들어와서...' 쪽이,

식상하다고 해도 작가 입장에서는 시간이 적게 들지 않겠는가.


참신함은 이걸 어떻게 비트는지를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라이트노벨 팬들은 인식하는 듯하다.

여자애의 핸드백이 넘어졌는데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다던가,

여자애가 남자애의 일기를 우연히 훔쳐보게 된다던가, 사실 가족이 안면식이 있었다던가...





아마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슬슬 자고 싶어서 관두겠다.

그러니까 이걸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냥 만화같이 쓰면 몇십 권도 쓸 수 있다 이거다.




읽어 준 사람 모두 고맙다.

그러니 너도 라노벨 츄라이.




책 이야기: '픽션들' 다 읽었다. 보르헤스, 그는 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