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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네 올센. 키르케고르가 사랑했던 여자. 하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니체 왜 읽음? 솔직히 거품 아님? 나 같으면 동시대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 읽음. 반박시 네 말이 맞음.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좀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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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

 

우리에게 한 청년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화자는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관찰자다. 주인공은 그의 친구이자, 한 처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 청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둘은 모두 동일한 인물이다. 사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분신을 복제해서 자캐를 가지고 설정놀음을 하기 좋아하는 소시민적인 면모를 가졌다. 그의 다른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다. 그러나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다. 혹은 그런 관계에 있어서의 그 관계가 또 그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가. 자기를 분열하고 싶어 하는 그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쨌든 이런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라고 자기를 칭하는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연애 이야기에 반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왜 그런가? 콘스탄틴이라는 이름까지 반복하는 요상한 짓을 해가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대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청년의 연애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청년은 한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왠지 그 처녀의 이름이 레기네 올센일 것 같은데 아쉽게도 정확히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으레 그 나이 청년들이 그러듯이 청년은 자기의 친구인 화자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 그런데 사실 연애 상담이란 정상적인 사람한테, 적어도 연애 좀 해본 사람한테 요청해야 하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화자는 정상은 아니었고 괴짜에 가까웠다. 화자는 극약처방을 내린다. 바람을 피우는 척 해라!

 

만약 당신에게 이렇게 상담을 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연애는 해봤는지 물어보도록 하자. 아마 안 해봤을 것이다. 끽해야 상대방 약혼 파토내고 스킨십도 못해보는 유혹자 정도는 되겠지.

 

일단 그래도 화자의 이야기는 들어보도록 하자. 왜 화자는 청년에게 그런 조언을 했을까. 화자가 청년의 사랑을 독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청년의 사랑은 이데아를 토대에 두고 있는 사랑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서 이데아는 초월적이면서 불변적이면서 과거적이라는 특징이 중요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면 쉽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완전한 본질이기에 현실과 구분되는 초월성을 가진다. 완전하기에 불변하다. 그런데 왜 과거적인가? 그가 보기에 인간은 한 10년 전쯤에 12800 세라나 주고 산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데아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상기, 즉 잊어버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으로 이데아를 되찾아야 했다.

 

청년의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다. 청년은 처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그가 사랑한 대상은 현실의 처녀가 아니라, 청년의 마음속에 각인된 이상형이다. 아름다움, 수줍음, 여성성, 처녀성, 겸손함을 가진 현모양처다. 그런 이데아를 사랑하게 된 청년은 현실의 처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이데아라는 상() 하나로 충분한 것이다.

 

고정된 이데아에 머무르는 한, 그의 사랑은 상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상기는 공허하다. 완전한 여성은 청년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준다고 말할 것이다. 청년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랑이 정말 좋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고 한 글자 적어놓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두 글자로 그저 만족해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그 완전한 것을 되새기는 한 적어도 청년은 평안할 것이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있어도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년은 이제 처녀가 없어도 되지만 처녀는 청년을 사랑한다. 청년이 처녀와 결혼한다면 그것은 가식에 불과한 것이다. 청년이 처녀에게 사실을 고한다면 처녀는 그를 인정하고 놓아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는 것도 처녀에게 사실을 말하고 떠나는 것도 불행에 이르게 된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조금 수수하게 생긴 여자 한명을 고용해서 한 집에 살게 한 다음, 야밤에 그녀의 집에 드나들면 된다. 사람들은 청년을 비난할 것이고, 처녀는 청년에게서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말에 청년은 따르지 못했다. 청년이 처녀를 배신했다는 후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미 사랑이 존재하게 된 순간, 청년이 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처녀에게 옳지 않은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청년은 하나의 한계를 만난다. 처녀는 청년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를 한정짓는 하나의 한계선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화자는 청년에게서 상기가 아닌 반복을 기대한다.

 

상기가 아니라 반복이다. 상기는 끊임없이 과거로 향하지만 반복은 현재에서 미래를 향한다. 이 반복의 사랑만이 행복한 사랑이다. 반복은 그 평온함을 흔들지언정 싫증나지 않는 것이며, 시작점이 어딘지 잃어버릴지라도 순간 속에 완전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복이 단지 오늘과 다른 내일이 새롭게 반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복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것일까. 화자는 자기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반복을 찾아 헤맸던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전에 갔었던 도시로 가서 전에 머물렀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전에 보았던 거리를 본다. 모두 똑같다. 동일한 숙소고 동일한 사람들이고 동일한 풍경이다. , 다른 것도 있다. 숙소 주인이 결혼했다. 그래서 화자는 반복을 찾았는가? 아니,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화자는 청년에게 반복을 말한다. 관찰자인 자기는 찾지 못하는 반복을 기대한다.

 

그 사이 청년은 화자에게서 다른 조언자를 찾아갔다. 조언자의 이름은 욥이다.

 

욥은 누구인가. 그는 의인이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정죄했다. 윤리라는 체계가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잃지 않았다. 그렇기에 윤리적 잣대는 바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알고 있었다. 욥이 무죄함을 말해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지상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저 옛날 현인도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그를 비난했다. 그의 말을 들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의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게 무슨 소용인가. 모두가 외면하는데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청년은 욥을 말하는 것이다. 욥의 마음에 있는 의는 무슨 역할을 했는가. 그가 계속 외치게 만들었다. 뇌성을 기다리며 신과 대결했다.

 

이에 대해 십자가 성 요한도 증언한다.

옳은 정화는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메마름에는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이 따른다.’

 

욥에게 포기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뇌성이 찾아왔다. 뇌성 속에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안티-클리마쿠스(‘죽음의 이르는 병의 저자)가 그런 것처럼 믿음의 도약을 한 것이다. 클리마쿠스는 누구인가. 존 클리마쿠스, 그는 지상에서 천국을 향한 사다리를 말했다. 그러나 욥에게 사다리는 없었다. 욥은 안티-클리마쿠스 인 것이다. 사다리는 없다. 도약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초월이다. 뇌성은 초월로 이끈다.

 

그 뇌성이 루터에겐 비텐베르크의 종성이었다. 그는 모든 번민의 씨름 끝에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한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뇌성 이후엔 어떻게 되는가. 청년의 말을 드러보자.

 

폭풍우는 가라앉았습니다. 뇌우도 지나갔습니다. 욥은 모든 인간들의 면전에서 꾸짖음을 받았습니다. 주님과 욥은 서로 이해를 하고 화해를 했습니다. ‘하느님의 우애가 지난날과 같이 다시 욥의 장막 위에 계셨습니다.‘ 인간들도 욥을 이해하였습니다. 이제야 그들은 욥에게로 와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를 위해 슬퍼하고 그를 위로하였고, 그의 형제와 자매들이 각각 그에게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욥은 축복을 받았고 모든 것을 갑절로 되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반복이라고 부릅니다.

 

뇌성 이후에 모든 것이 반복되었다. 그 때는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모든 확실성과 확률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받았을 때다. 일체의 모든 것이 상실되었을 때다.

 

그래서 청년도 뇌성을 기다렸다. 그저 기다린 것이 아니라 뇌성을 찾아 발버둥쳤다.

 

그 끝에 뇌성은 있었는가? 있었다. 뇌성이 그에게 찾아왔다. 처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그제서야 청년은 일체의 모든 것을 다시 얻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이다. 처녀는 다시 청년을 되돌려 주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얻은 것이다.

 

이것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일찍이 성 버나드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유한한 인간이 자기를 내려놓을 때,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을 얻었다. 자기의 유한성이 허물어질 때, 무한성 안에 속해졌다. 그 때에 무한 속에 있는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화자는 청년의 뇌우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누구였는가? 자기 자신이었다. 관찰자는 오직 생각할 뿐이다. 청년처럼 몸소 뛰어드는 자가 아니다. 도약하는 자가 아니며, 도약을 바라보는 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관찰자는 뇌성을 기다릴 수 없었다.

 

 

 

, 그럼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반복하지 못하는 자로서 한 가지 상기해 보려고 한다. 나는 니체가 거품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제목을 보고 헐레벌떡 들어와서 반박하려고 했겠지. 하지만 반박하기 전에 스스로가 관찰자인지 참여자인지 살펴보지 않겠는가.

참여자가 되려는 자에게 말한다.

 

926일 일요일 저녁 7, 성경 독회 욥기진행하니 많이 참여해 주길 바람.

욥기 27장까지 읽고 감상을 댓글에 써주면 됨.

 

사실 이 글은 조금 긴 성경 독회 홍보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