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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邊境)은 쉽게 말해 ‘변방의 경계’를 일컫는다. 미국과 소련이 패권을 다투던 60년대에, 남한과 북한은 그 두 제국이 맞붙는 ‘변방의 경계’인 셈이다.

고로 ‘변경’은 남북한의 정치 상황이 두 제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함의하며, 더 나아가서는 남북한 역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십분 활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제목이 ‘변경’이다.

국문학에서 ‘대하소설’이란 장르는 나름의 규칙성을 갖는데, 그중 하나가 ‘현대인이 갖는 비극의 원인을 지나간 시대의 일로 환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극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전쟁과 분단일 수밖에 없다.

민족적 비극을 세계적인 시야로 확대하려는 이문열의 ‘변경론’ 자체는 꽤나 설득력 있어 보인다. 다만 그러한 의도가 작품에 잘 반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첫째, 이 작품은 국제 정세를 소설 내부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작중 ‘변경 이론’을 확립한 사람은 황석현 기자와 김시형 교수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군 밑에서 하우스보이를 하던 초반부에 주로 등장하고, 정작 ‘변경 이론’이 정립되고 행해지는 후반부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뒤늦은 등장에는 ‘이론’만 있을 뿐, ‘적용’은 부재하다. 그들은 이병주 <그해 5월>의 외국인 기자 조스와 같은 역할이 되어 국제적인 시각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또 홍사장-정섭 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문열은 한국의 발전을 ‘민주화’보다는 ‘산업화’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때 ‘산업화’에 대응하는 두가지 방식으로 ‘천민자본주의’와 ‘진정한 산업화’가 제시되고 있다.

영희는 천민자본주의를, 그리고 홍사장-정섭 부자는 기술 발전을 통한 ‘진정한 산업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희가 주연급 인물인 데 반해, 홍사장-정섭 부자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조연일 뿐이다.

작가의 의도가 보다 적확히 반영되려면, 홍사장-정섭 부자는 영희와 비슷한 급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서술되었어야 한다. 이들이 단지 몇 페이지 서술되고 끝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둘째, 주연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변경>의 주인공 격인 명훈, 영희, 인철은 월북한 아버지를 두어, 정치 참여에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광장>의 이명훈이나 <관부연락선>의 유태림하고는 같을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 중립국을 택한 데 반해, <변경>의 주인공들은 애당초 선택이 제한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특수성은 <변경>의 주제의식을 풀어내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하지만 소설적 재미를 더하는 요소로는 무엇보다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변경>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 찾기’, 혹은 ‘부친살해’로 일컬어지는 콤플렉스 극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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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어도 아버지의 법은 건재하다. 지젝은 카이사르가 죽은 이후에 황제 통치가 시작되었다며, 카이사르-인물의 죽음은 카이사르-이름으로 반복된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러시아 황제 ‘차르’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다시 말해, 죽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 곧 아버지의 법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변경>의 4남매는 아버지가 부재하지만, 아버지의 법은 여전히 견고하게 적용된다. 그것은 ‘부르주아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회적 자아이며, 변경 논리에 의해 그들에게 가해진 억압과 배제, 감시의 상흔(傷痕)이다.

그렇다면 이 4남매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변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대략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명훈과 옥경의 경우이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자기인식을 확립한다. 뼈대 있는 가문의 장자로 태어난 명훈에게는 항상 귀족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부르주아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탓에 그는 대학, 농촌, 언론계 등 수많은 직종을 방황한다. 그러나 그 끝에 이르러 명훈은 스스로를 “나는 프롤레타리아다.”라고 호명한다. 그것은 부르주아 출신의 아버지를 뛰어넘는 한가지 방식이다.

두 번째, 영희의 경우이다. 그녀는 앞서 말했듯이 천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야비한 짓이든 서슴지 않고 행한다. 끝내 그녀는 악착스럽게 부르주아의 자리에 도달한다. 이는 공산주의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가장 극단적인 시도이다.

세 번째, 인철의 경우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계급의 지식인이다. 그가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택한 것은 자못 당연하다. 사회를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인식하여 시대적 성찰을 빚어내는 일은 당시로서는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철에 이르러, 부르주아 출신의 공산주의자 아버지는 가장 완전에 가까운 방식으로 극복된다. 명훈, 옥경이 노동운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아버지의 유지를 잇고, 영희가 아버지의 계층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지우지 못한 데 반해, 인철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가장 철저하게 벗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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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변경> 속에서는 시대의 흐름보다도 작가의 특수한 가정사와 돌출된 자의식이 더욱 돋보인다. 아마 이문열의 의도는 한국 사회를 거시적으로 풀어내는 데 있었을 테지만, 그 부분에서는 조금 아쉽다는 평가를 남기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12권에 걸쳐 무엇을 보았는가? 월북한 아버지를 둔 아들로서의 피해의식과 향상심(向上心)을, 그리고 분홍무지개라는 낭만의 도피처를. 그렇다. 나는 <변경>에서 이문열의 그림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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