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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세주로의 기대와 탄생
정감록. 조선 이씨 왕조가 멸하고 새로운 성씨인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가 등장한다는 책이 유행하던 조선왕조 말기에 구세주의 운명을 짊어진 정 진인이 태어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왕의 운명을 지고 태어났다. 국가 건국의 신화적 요소들이 윤색되어 그에게 입혀진다.
간난아이임에도 호랑이에게 일격을 당해 절벽에 굴러떨어져 일반인이라면 즉사했을 상황에서도 머리에 ‘ㅣ’자 상처가 남는 흉터를 남기는 정도에 그친, 서서히 나이가 들며 ‘王’자가 이마에 새겨질 그는 운명적으로 왕으로 결정지어졌다.
하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나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 등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자들도 실질적인 힘에 밀려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황제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시대다.
하물며 그 정통성인 혈통을 타고나지 못하여 그 무너질 권위마저도 없는 인생은 얼마나 고단할 것이며, 또한 왕으로서 인생이 결정된 자의 인생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2 투쟁과 고난
정 진인의 세계관에 동조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소작권 등 각종 경제적 이익을 주어야만 따르며 이들을 복종하게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 정 진인의 과제였다.
하지만, 정 진인의 싸움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줄 아군을 포섭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외부 세계와의 마찰, 즉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계와의 대결이다. 이것은 왕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의 대결뿐만 아니라 국가 영토를 유린하는 제국주의의 횡포와의 대결이며, 정 진인의 존재조차 용납하지 않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체계와의 대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세력은 이런 대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기 이를 데 그지없다.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문제를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겠지만, 원시적으로 자기 통제범위를 벗어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계속 바위를 굴려야하는 시지포스의 인생처럼 불행한 것이다. 정 진인의 왕으로서의 투쟁의 과정을 듣고 본 여승은 또 다시 그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정 진인을 보고는 ‘미망이로구나 깨어야 할 미망이로구나’라는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세상은 정 진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세간의 조롱에도 정 진인을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만의 세계관 추구의 일관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낭만적 모습 때문일 것이다.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황제의 위엄으로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식 제도를 따르는 공무원이나 대학생들을 꾸짖는 일갈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 것에 머물러 있는 고루한 인간상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새로운 가치들이 난립하여 내 세계를 유린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믿음과 가치를 지키려는 고귀한 투쟁인 것으로도 보인다.
3 구세주로의 길
하지만 황제로서의 삶을 살던 정 진인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와의 대립 끝에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그의 운명이 스스로의 변화에 의해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황제이고, 황제는 자신의 나라를 다스린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다스림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국가에 의해 행위를 강요당하고 수탈당하며 ‘다스림’을 받는 것으로 위장된 백성들의 가혹한 운명을 해방시킨다. 그로 인해 황제라는 명칭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치자’의 의미는 없어지게 되고, 실질적인 황제의 의미도 사라진다. 그는 무위자연의 길로 나아간다. 황제고 백성이고 모두가 우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자유롭게 흐를뿐이다. 드디어 자신의 일생을 옭아매던 다스림의 압박, 전 근대적인 황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어 일종의 자유를 얻은 것이며, 가혹한 백성들의 운명도 해방시켰다.
백성들의 피치자로서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그는 정감록의 예언대로 새로운 세상의 진정한 구세주가 되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황제의 무위자연에 의한 통치 선언에 따라 가혹한 피치자로서의 운명의 해방을 맛보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황제의 공표 이전에 계급 세습에서 나오는 전근대적 운명결정에서 벗어나게 되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황제의 깨달음은 물론 시대의 흐림에 비해 느렸다. 하지만, 그 간극과 시차 때문에 우리는 이 소설을 읽고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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