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독회 본문 : 욥기(42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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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독회 일정 : 2021년 10월 10일 19시
다음 주 독회 본문 : 시편(75장까지?)
다음 주부터 독회 들어가는 시편 분량이 너무 많아 고민이네요 이거;
150장 반반 나눠서 하자니 참가하는 분들 부담이 심할거 같고 그렇다고 30장씩 다섯번 하자니 너무 루즈해지는것 같고
중요한 시만 몇개 읽고 넘어가자니 제가 중요한 시를 추려낼 수 있는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고민이 많습니다. 일단은 75장씩 해볼까 하는데 참가자 여러분의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1. 32장부터 나오는 엘리후는 상당히 뜬금없이 등장했다 사라집니다. 욥과 세 친구중 아무도 엘리후의 담론에 참여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게 부자연스러워 뭐지? 싶었는데.. 주석서에 따르면 엘리후 파트는 후대에 세 친구들의 논증을 보충하기 위해, 호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첨가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2. 욥기의 결말(욥이 보상받음)은 욥을 통해 계약신학을 비판한 저자의 의도와 다소 거리가 있는 듯 합니다. 왜 결말이 주제와 상반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찾아보니 이런 형식이(마지막에 보상을 받음) 욥기가 영향을 받았을 고대 근동 지방의 지혜문학 형식과 같다고 하더군요.
좀 쉬었다 와서 마저 쓰겠읍니다
무슨 주석서입니까 욥기 강해 좋은 책을 알고 싶습니다
가톨릭 주석성경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주석서는 아직 찾아보지 않았읍니다
3.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해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유한한 하느님을 단죄하지만, 결국 현존하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옴으로서 그 모든것이 잘못된것임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유한한것은 인간임과, 하느님을 단죄하는것은 곧 자신을 단죄하는것임을 깨닫게 되는게 인상적입니다.
4. 끝으로 욥기를 진지하게 읽어본적이 없었는데 이번 독회와 참가자분들 덕분에 진지하게 읽고 그 의미를 읽어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독회하기 전까지만 해도 욥기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엘리후의 말은 세 친구들의 주장과 살짝 다르지만 결국엔 친구들이 했던 말을 반복하는 식이라 보는데, 주님이 나타나서 엘리후에게 아무 말도 안한 건 뭘 의미한다 봄?
엘리후가 후대에 첨가됐을거라는 설을 가정하면.... 엘리후 이야기의 저자가 욥기의 결말을 수정하고 싶지 않았던게(혹은 수정하기 힘들었거나) 아닐까요?? 그게 아니면 엘리후의 논증이 마음에 들었을수도 있구요
혹시 지금의 욥기가 수정본이라는 학설이 주류라면 그 이전 원본의 흔적같은 건 있나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엘리후의 말은 앞에서 욥이 말한 세 번의 대화에 대응하는 말이라는 견해가 있음. 욥기가 편집되었다는 것은 편집비평으로 접근한 결과고, 실제적으로 그런 내용이 빠진 필사본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음. 다만 추측하는 이유들은 엘리후가 앞의 네 명의 대화에 비해 문체가 간결하다거나 처음과 마지막에 엘리후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욥의 호소가 하나님의 대답으로 연결되는 맥락을 끊는다는 이유들이 있음. 그러나 엘리후가 삽입된 것이 아니라 원저자의 이야기에 속한다는 견해도 있긴 있음.
1. 37장은 엘리후의 말을 통해 이야기는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승화되는 것으로 보임. 즉, 38장을 예비하는 단락으로서,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드는 단락으로 보임. 2. 엘리후의 말을 따라 폭풍 속에 임하는 하나님은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일들을 말하심.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침묵임. 이 침묵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경험한 반응으로서, 자기의 미천함을 깨달은 것으로 볼 수 있음. 3. 그러나 하나님의 두 번째 대화는 또 다른 것을 시사함. 마찬가지로 욥에게 이해할 수 없는 악을 말하심. 그리고 이 주제가 일관된다는 생각이 들었음. 즉, 악어와 하마로 번역되는 레비아탄과 베헤모스는 실제 생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사람은, 아무리 의롭고 높은 욥이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다스릴 수 없고 잡을 수도 없음. 41:34를 보면 이것이 조금 더 명확해 지는데, 성경에서 짐승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임. 그런데 짐승 자체를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왕으로 묘사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봄. 오히려 40:11-12의 악인과 교만한 자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에 가깝다고 여겨짐. 그리고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첫번째와 다름. 그는 이제 주를 알고자 함. 자기를 제한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함. 이것이 그의 두번째 깨달음임. 악에 대해 하나님을 요청해야 하는 인간의 신앙적 반응을 욥은 보여주고 있음. 4.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면, 내가 본 욥기 전체의 결론은 신 앞에서의 굴복과 경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음. 이는 다들 동의할 수 있으리라 봄
5. 문제는 결론 부분이겠지. 결론에 욥의 재물과 자식들과 친구들이 돌아오는 것이 과연 옳으냐 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이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했음. 먼저 19:26을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전제해야 함. 이는 정말 욥이 부활을 믿었던 것이 아님. 욥에게는 두 가지 전제가 있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욥도 의롭다. 고난에 대해 친구들은 두번째 전제를 공격했음. 그러나 욥은 두 가지 전제가 무너지지 않았고, 결국은 죽은 뒤에 부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적 결론임. 간단히 말하자면 19:26은 그가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말임. 이것이 그의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이후 다시 절망하는 것으로 알 수 있음.
둘째, 욥기에서는 때와 기한이라는 언급이 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함.(찾기 귀찮) 그러니까 부활은 욥의 논리적 결론일 뿐이고,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하나님을 보는 것임. 고난을 이해하는 것임. 그리고 선악은 모두 기한이 있기에, 욥에 대한 적절한 이야기 마무리는 그의 시련의 때가 끝나는 것임. 물론, 욥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답을 얻었고, 무언가 이해했겠지. 하지만 그의 시련이 끝났다는 외적인 징표가 필요함. 그것이 그의 재물의 회복이고 지상의 아름다움임.
6. 이전 글에 누가 테드 창 소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욥의 축복이 이야기상 맞지 않다고 말한 것 같은데, 이런 의미에서 난 오히려 욥에겐 재물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보았음. 시련의 때는 끝났으니까. 그리고 그가 시련의 때가 끝났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욥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는 적절한 마무리로 보임.
욥에게 다시 보상이 주어진다는건 어떻게 보면 가장 적절한 결말이라 볼수도 있는거 같음. 계약신학(나는 무죄하니 하느님께 권리를 주장해도 되겠지 하는)을 비판하는 주제가 조금 희석된듯도 하지만, 욥이 마지막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였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1. 나도 그렇게 생각함ㅇㅇ 2. 혹은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하느님을 인간의 잣대로 단죄하다 초월적인 하느님을 직접 뵈니 자기가 했던 비난들이 말이 안된다는걸 깨달아서 조용해졌을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봄 3. 브헤못과 레비아탄은 신화적인 괴물들로, 광란과 무질서 그리고 혼돈을 상징하는 괴물들이라고 함.
2. 확실히 40:4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일단은 앞에서 자기가 말해왔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니까. 3. 아 이건 첨 알았네
신이 한 말이 어떻게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는거임?
내가 말하는 것은 신이 잘못 말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님. 나는 정말 좋은 방법을 취한 것 같음.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침묵한 것처럼 신도 욥 같은 인간에 대한 유한성, 혹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욥기의 저자는 아주 잘 꿰뚫어 본 거 같았음
ㅇㅇ 님 견해가 맞는 것 같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욥의 시선을 인간 중심적인 시선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시선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음. 인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신비 앞에서 사람이 자기를 내려놓는 것. 그것이 나름 적절한 해석인 것 같음.
인간 중심 시각에서 신 중심 시각으로 돌린다는 표현이 멋지네
좋은 해석인것 같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본 하느님은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죠.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고통에 반항하고 번민하다 하느님 현존을 마주하자 그 모든것을 깨닫게 된다는게 핵심인것 같습니다.
시편은 75편 x 2 해도 될듯. 내가 보기에 시편은 전부 읽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거나 좀 신경 쓰인다 싶은 부분 위주로 참가해도 괜찮은 책으로 보임. 댓글에서 이 부분 인상깊었다 하고 말을 해도 보는 사람이 그 시만 찾아서 읽어도 이해하는 데에 무리 없고.
ㅇㅋㅇㅋ 그럼 75장씩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