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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 것들은 냄새가 난다’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가 아니라 1900년대 초반 영국의 계급사회에 따른 상류층이 평민을 보던 일반적인 시각이다. 오웰은 많은 분량을 계급의식을 꼬집는데 할애한다. 특히 너는 그래도 나는 그러지 않는다는 내로남불식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지식인 및 일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 면모를 폭로한다.
‘물론 계급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누구나 ‘자신’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 계급은 경제적 요소에 따라 그 계층을 세분화한 형태로 변화하여 자연스레 우리 사회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계급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계층을 구별짓는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느 대학에 갔는지, 어느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한다.
‘감상주의자의 견해란 현실과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돌변해버린다. … 그런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와 진정으로 접촉할 기회를 줘보라(이를테면 토요일 밤에 술취한 생선 운반인과 싸우도록 내버려둬보라). 그러면 그들은 가장 평범한 중산층 속물근성을 대번에 드러낼 수 있다.’
설령, 그런 계급의식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라도 생선운반인 일화를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건대 조지오웰의 비판이 당대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성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이중성 마저 폭로하는 거 같아 부끄러워진다. 후대까지도 꿰뚫어버리는 통찰력이다.
하지만, 상류층에 속해, 평민을 멸시할 것을 교육받고 사립학교를 다니며 평민들을 경멸할 것을 교육받은 조지 오웰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조지오웰은 신분적으론 상류층이였지만 경제적으론 그 중에서도 하층이였기 때문에, 식민지 버마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식사예절을 잘 알아도 예절을 지킬 음식을 먹지 못했고 승마예절을 알아도 탈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물가가 저렴한 식민지에 가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 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 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바뀌기 위해서는 큰 사건을 겪어야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웰에게는 식민지 시절 압제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압제자로서의 역할을 꺼리고(에세이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피압제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설만큼 자유에 대한 염원이 강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웰은 버마를 떠나 영국으로 향한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오웰은 식민지 시절 깨우친 피압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대공황 시기 당당함을 잃고 어려움을 겪는 노동계급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진다. 그리하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진보적 독서클럽의 취재 제안에 따라 시작했지만, 그 이전부터 빈민수용소 등을 전전하며 실제 하층민의 생활을 겪고 살을 부비벼 생활했던 시기의 모습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에세이 스파이크) 그의 하류층에 대한 진심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오웰은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압제자의 입장으로 피압제자들의 입장에 섰던 것을 보았을 때 피압제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돋보였다.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압제에 맞서고 싶어졌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지금의 염증을 어리석음이나 부패한 동기 탓으로만 보아 넘겨버린다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런 염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보거나 적어도 그들과 같은관점에서 헤아려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해결하려면 제대로 들어봐야 한다.’
문제를 인식함에 있어 오웰의 그 역지사지의 태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역지사지로 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역지사지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이해를 받고 있고, 그만큼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고 자체는 인간을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전제된 행동이다. 이런 정신에 입각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오웰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건설을 주창한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바라는(그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오웰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며, 결국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책은 오웰이 자신이 꿈꾸는 민주적 사회주의로 가는 방해요소와 올바른 실천 방안을 제시하였다. 물론, 나도 사회주의를 긍정하진 않지만,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유에 기반한 그의 휴머니즘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검토해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웰은 존나 따스한 사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