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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은 현종과 숙종 대를 거치며 서인(노론)측 영수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현종 대 이후 송시열은 북벌대의의 대표인사이자 군주마저 뛰어넘는 사림 공론의 대표주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그만큼 군주, 남인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군주의 위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일어난 두 차례의 예송부터, 노론과 소론 분기의 원인이 되었던 회니시비까지, 송시열은 당시 정치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송시열은 국가를 다시 일으켜나가는 데에는 의리 명분의 재확립과 민생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존명의리의 확립과 성리학적 질서의 재확립을 중요시했다. 전자는 만동묘 등의 건립 사업과 춘추의리를 앞세워 원에서 벼슬했던 성리학자 허형에 대한 문묘 퇴출 건의로 이어졌고, 후자는 정종과 생육신 사육신, 추숭 논의, 소학언해의 집필 등으로 나타났다. 


민생안정을 위해 송시열은 보수 정치가 답지 않은 여러 제도개혁 주장을 했다. 대표적으로는 공안의 개정을 통한 균부균세의 실현, 대동법 확대 실시에 대한 노의, 양반호포론과 사창제의 건의 등을 통해 당시 무너져가던 민생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 중 주목할 만 한 정책은 양반호포론인데, 양반에게도 포를 걷자는 주장은 보기에 따라서는 신분제를 흔드는 주장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진보적 주장이었다. 보수 정치가의 대표로 여겨지는 송시열이 이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은 언뜻 놀라워 보인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이의 경장론을 충실히 이어받았고, 당시 사회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균등하지 못한 부역 분배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양반 계층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암의 이러한 제도개혁론은 상대 당파의 반발과 기득권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붕당정치의 폐해를 볼 수 있는데, 상대 당파가 주장한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대를 일심는 바람에 노론이건 남인이건 민생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제대호 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영조와 정조는 탕평정국을 이끌며, 군권의 강화를 이루어냈지만, 이도 결국 세도정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송시열은 나름의 경세론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회니시비와 윤휴와의 관계 등에서 드러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 부족, 지나친 독선으로 본인의 죽음을 재촉했고, 그의 인간성은 그의 경세론마저 그의 독선적 면모에 가려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그의 세도(世道)정치론에 관해서인데, 이는 조선 말 외척 등이 위세를 부리는 세도정치가 아니라 현명한 산림(대학자)흫 중심으로 한 사림들의 공론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송시열은 지나친 군권 강화는 외척과 군주 측근에 의한 부패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사림 공론의 활성화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과연 붕당간의 배척이 심해진 시기에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당론은 사론이라고 할 정도로 공론의 기능을 잃은 상태였고, 결국 송시열이 말하는 공론은 노론을 포함한 여러 당파가 아니라 노론 개인의 공론이었기에 이것이 진정 '공론'이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또한 송시열의 세도정치가 과연 특정 세력만의 공론 독점으로 이어지지 않을 지도 상세히 검토해봐야 하는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아직도 많은 검토와 연구가 필요한 문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