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겔과 다르다
나의 두뇌가 내 의지에 거의 역행하다시피 하여 오랜 생애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 일에 몰두한 것은 오로지 인류를 위한 것이었으며 일시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솔한 무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중 이 일의 가치에 대하여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언제나 그릇된 것, 나쁜 것, 마침내는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것(헤겔 철학)이 대중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 열풍 비판
만일 우리가 한번 마치 현재의 독일에 있어서처럼 철학에 대하여 유별난 활기를 갖고 일반 사람들이 철학을 일삼고 철학에 대하여 쓰고 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와 같은 운동의 근본동인, 숨은 동기는 제아무리 점잔을 빼고 단언을 한다손치더라도, 그 목적은 이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데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목적과 직무상의 목적과 교회의 목적, 그리고 국가적인 목적에 있는 것이며, 요는 이런 경우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실질적인 이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당파적 목적이 이른바 철학자들의 많은 펜을 저토록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목표가 참된 지혜에 있지 않고 어떤 의도가 이 시끄러운 무리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경우 진리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생각해 내는 물건이 된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전제할 수 있다.
어용교수들이 판을 친다
정부가 철학을 국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학자들이 철학교수의 지위를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종사하는 자들의 생계를 위한 작업이라 간주한다. 따라서 그 학자들은 자기들의 마음가짐이 훌륭하다는 것, 즉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목적에 부응하도록 힘쓴다는 것을 보증하고서 앞을 다투듯 철학교수의 지위를 얻으려고 한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정신적 괴물이다
내 책은 실로 명확하게 성실함과 솔직함이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보아도 칸트 이후 유명한 세 궤변가의 저작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나는 그간 끊임없이 거짓된 것과 좋지 못한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혹은 허풍(피히테와 셸링)과 자만(헤겔)이 최고도로 존경받고 있는 것을 보아왔으므로,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지지받는 것을 일찍부터 단념하고 있었다. 나와 동시대인들은 20년 동안 헤겔과 같은 정신적 괴물을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소리 높여 선전하여 그 반향은 전유럽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본 사람으로서 그러한 현대인들의 갈채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헤겔 학파는 쓰레기다
최근 몇 년 동안에 헤겔 학파의 여러 저서에서 칸트 철학을 서술한 것이 나왔는데 실로 당치도 않은 것을 써놓고 있는 것이다. 이미 청소년기에 헤겔식 헛소리에 두뇌를 마비당하고 상한 사람들이 어떻게 심오한 칸트의 연구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일찍부터 공허하기 그지없는 미사여구를 철학 사상이라 생각하고 빈약하기 이를바 없는 궤변을 예지(叡智)라 생각하며 어린아이 같은 헛소리를 변증법이라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고, 더군다나 되는 대로 주워 모은 언어를 채용했기 때문에 - 정신은 조어(造語)를 사용하여 무엇을 생각하는 데 쓸데없는 고생을 하여 지쳐버리지만 - 그들의 두뇌는 조직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성에 대한 비판도, 철학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정신의 의약(medicina mentis)이 꼭 알맞고, 먼저 하제(下劑) 대신에 '상식학 소과정'을 주어놓고 그 뒤에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서 철학이라는 것이 문제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남 눈치 보지 않는다
대학 철학은 여러 가지 목적을 세우고 여러 가지 점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그들의 길을 열어왔지만 언제나 군주에 대한 두려움과 내각의 의향과 국교의 규칙과 출판자의 희망과 학생들의 요구와 동료 간의 우의와 정치의 흐름과 대중의 경향과 기타 백 가지 일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조용하고 진지한 진리 탐구는 개인적인 목적이 언제나 내면의 동기가 되어 있는 강좌(講座)나 강의석에서 교환되는 학자들의 소란스러운 논쟁과 공통되는 점이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 두개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질을 달리 한다. 때문에 나는 아무런 타협도 동행도 없다. 나와의 관련 속에서 덕을 볼 사람은 진리 이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뿐일 것이며, 따라서 현대의 여러 철학적 당파들은 전혀 덕 될 것이 없다.
칸트 빠순이 쇼펜하우어
실로 칸트의 주요 저서를 읽는 사람이 그의 정신에 받은 영향은 이미 이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장님이 백내장 수술을 받는 것과 비할 수 있으리라.
칸트의 학설은 그것을 이해한 사람의 두뇌에, 정신적 재생이라고까지 생각될 정도의 크나큰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고난 지성의 근원적 규정에 연유하는 실재론을 정말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칸트 철학뿐이며, 버클리와 말브랑슈의 철학으로는 불충분한 것이다. 그들은 일반론으로 너무나 일관했지만 칸트는 아주 면밀하게 파고들었으며, 더욱이 그 방법은 그 이전에 원형도 없고 그 이후에 복제도 없는, 전적으로 독특하고 직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향을 정신에 끼쳤다. 이 결과 정신은 환상에서 깨어나 모든 사물을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칸트 철학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연구하든 이른바 원시적 관점, 즉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실재론의 관점에 있었던 것이고, 우리 모두가 타고난 그대로의 상황이며, 다른 모든 가능한 것을 할 수 있는 힘은 있어도 다만 철학을 연구하는 힘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 있는 사람과 칸트 철학을 이해한 사람과의 관계는 미성년과 성년의 관계와 같다.
칸트를 모르는 자들이 많아지고, 칸트의 거작을 소홀하고 성급하게 읽든지 또는 간접적인 소개문으로서 읽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중략) 칸트 철학을 다른 사람들의 서술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제할 수 없는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칸트의 저작은 칸트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도, 그 틀린 경우마저 모두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있다. 그의 독창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참된 철학자에 대해서 본디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들을, 그에 관한 한 최고도로 말할 수 있다. 즉 참된 철학자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철학적 사상은 다만 그 사상을 수립한 사람 자신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 연구를 갈망하는 사람은 철학에 대한 영원한 스승을, 그 스승의 저작인 고요한 성전(聖殿) 속에서 구하여야 한다. 참된 철학자들이 만든 저작의 어느 것을 보더라도 그 주요 장절 속 학설에는 속된 두뇌의 소유자들이 행하는, 산만하고 따분한 학설의 백배에 해당하는 식견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세인이 제3자의 손에 의해서 서술한 쪽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친화력이 작용하는 것같이 생각되며,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것에 끌리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이야기한 것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들으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어린이들이 자기 또래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상호교수법과 동일한 원리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소수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언제나 소수의 사람(paucorum hominum)의 것일 것이며 그런고로 사고법(思考法)으로 그것을 감상하여 줄 소수자를 침착하고도 겸손하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하면 (중략) 현대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참되고 확정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대놓고 반대하는 사상을 페이지마다 읽게 될 테니 참고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진리는 길다.
진리는,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기간은 매우 짧고 그 이전에는 그것이 역설로서 비난받고 그 이후에는 진부한 것으로서 모멸당하는 기나긴 기간이 있을 것이다. 진리의 창도자에게는 역설을 부르짖는 자로서 비난받을 운명이 늘 따라다닌다. - 그러나 인생은 짧고, 진리는 멀리 그 힘을 뻗치고 오래 살아간다. 그런고로 우리는 진리를 이야기하도록 하자.
나는 나와 동시대의 사람,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 인류에게, 이번에 완성한 내 책이 가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교부한다. 비록 그 가치가 선한 자의 운명이 언제나 그러하듯 후세에 가서 비로소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중략) 사실 이 고난과 욕심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그 고난과 욕심을 위하여 사역당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이 세상의 저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광명과 진리에 대한 고귀하고 숭고한 노력이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고 진전하여 존재하기가 어렵다.
진리는 오히려 그와 같은 철학적인 소란스런 다툼 속에서도 마치 교회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겨울밤과 같은 시대를 지나왔듯 조용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며, 이 겨울밤과 같은 시대에 진리는 비밀스러운 교리처럼 소수의 숙련된 인사에게만 전달되든지 혹은 옛 사본의 형식으로서만 전달되었던 것이다.
꽤 오랫동안 철학은 일반에게 한편으로는 공적인 목적의,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인 목적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 30여년 전부터 나의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이것은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다른 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본능적 충동에 자극받은 것이었지만 그 충동의 버팀목이 된 것은, 누군가 한 사람이 진리를 생각하고 숨은 것을 밝혀내면, 그것은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사유하는 사람에 의하여 파악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끌어 기쁘게 하며 위로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진리만이 나를 인도하는 별이다. 이 진리의 별에 따르면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충실하면 그만인 것이고, 훌륭한 정신적 노력이 이미 고갈하여 침체되어 버린 시대와 그 상한 언어를 야비한 정신과 결부시키는 기술만이 최고도로 발달한 국민문학,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해 버린 국민문학으로부터는 완전히 돌아선 것이다. 물론 사람들 저마다의 본성에는 그 특유한 결점과 약점이 있듯이, 내 본성에도 필연적으로 있을 결점과 약점을 피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그 결점과 약점을 고상하지 못한 순응으로 더 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철학은 헤겔놈들과는 다르다
나의 철학은 이들 철학 교수들이 교묘히 만들어 낸, 그들에게는 없어서 안 될 허구의 이야기처럼 직접적으로, 절대적으로 인식한다든지 직관한다든지 지각하는 따위의 이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이성의 허구를 독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들어 놓으면 그 뒤부터는 칸트에 의하여 우리의 인식으로서는 영구히 차단된 모든 경험의 가능성을 초월한 영역까지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마치 쌍두마차로서 출입하듯 들어갈 수 있다. (중략) 나의 철학은 - 이 철학은 다만 이 벌거벗은 보답도 없고 친구도 없으며 때로는 박해도 받는 진리만을 갖고 있을 뿐이고, 좌우를 살피지도 않은 채 일직선으로 진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 저 훌륭하고 보수도 좋은 대학 철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대개 고르기아스나 히피아스 같은 궤변가들이 위에 서서 바보 같은 일들이 성행하고 기만하는 자와 기만당하는 자들의 합창에 방해되어, 홀로 가는 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 그렇더라도 참된 작업에는 그 일에 독특한, 완만한, 강한 작용이 남는다. 그리고 대중은 마침내 그것이 그 소란 속에서 솟아,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구 위의 짙은 대기를 넘어서 청명한 층으로 올라가는 경기구(輕氣球)와 흡사하며, 그것이 한 번 이 층에 도달하면 그곳에 머물러 어느 누구도 다시 아래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머리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멋진..쇼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