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책에도, 당시 신문 기사에도 그렇게 언급되어 있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현재의 공식 표기는 '북조선(北朝鮮)'
한국에 '남'을 붙이지 않는데 북한에는 꼬박꼬박 '북'을 붙이는 이유는, 북일 간에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 것으로 알고 있음.
그런데 사실 조선을 '선(鮮)'으로 줄이는 용법은 일본에서만 쓰이는 용법으로, 일종의 멸칭임. '조센징'은 그냥 조선인이지만, '센징'은 빼박 경멸의 의미로 쓰이듯이 말이지. 물론 '북선' '남선' 같은 표현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쓰이던 표현이긴 한데, 역시 멸칭에 가까운 것이었음.
해서 당시 일본은 지금보다도 북한에 대한 악감정이 더 많았거나,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듯함.
의외로 찾아봐도 뭔 자료가 없네.
논문은 있는데 유료라 못들어가구.
납북 심심하면 하니
국제적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본격화되고 있던 1950년대 중반, 북한과 일본 사이에는 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1955년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는 연두 기자회견 을 통해 소련 및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개최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북한과도 경제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신정화 2004, 52).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2월 25일 북한 외무성은 성명을 통해 “상이한 사회제도를 가진 모든 국가들과 평화공존의 원칙에서 출발하여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로동신문 1955/02/26). 3월 26일에는 하토야마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모든 국가 및 민족과 가능한 한 우호관계를 증진하고 싶다고 발언함으로써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를 표명하였다(신 정화
이러한 성명과 발언 등을 통해 양국의 국교정상화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955년 10월 1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초청으로 후루야가 이끄는 방문단이 방북하였으며, 10월 21일 북한 당국과 일본 방문단은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공동선언에는 국교정상화를 위한 양국의 적극적인 노력, 수교 여부와는 별도로 경제적 교류의 추진, 어로 자유의 보장, 양국 교민들의 본국에 대한 자유로운 왕래 보장, 상호간의 문화교류
그러고보니 이노키도 방북 몇번 했었지
실현 등이 천명되었다(로동신문 1955/10/22). 이러한 가운데 일본 내에서는 ‘일조(日朝)협 회’가 구성되고, 1956년 3월에는 ‘일조무역회’가 구성되어 양국 간 무역을 위한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일성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일본과의 정상적 관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이는 아시아의 평화 공고화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국 토통일원 1988a, 77).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1957년 기시 내각의 출범과 함께 일본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으 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1959년 8월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 북송협정’이 맺어지기도 했지만,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양국 관계는 멀어지